두 번째로 선사로서의 도선의 전기와 사상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1) 도선의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흥덕왕 2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2) 그의 선대와 부조는 역사에서 기록이 빠졌다. 혹은 그가 태종대왕의 서손(庶孫)이라 한다.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 나는 구슬 1개를 주면서 삼키라 했는데, 그 후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도록 매운 것 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반드시 명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을 보자.

(15세에) 월유산(月遊山) 화엄사에 나아가서 대경(大經)을 독습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문수(文殊)의 묘지(妙智)와 보현의 현문(玄門)에 모두 계입(契入)하여 남음이 없었다. 문성왕(文聖王) 8년(846) 20살 때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한 나머지 말하기를, ‘대장부(大丈夫)가 마땅히 교법(敎法)을 여의고 스스로 정려(靜慮)하여야 할 것이어늘, 어찌 …… 문자(文字)에만 고수(固守)하고 있겠는가.’ 이때 혜철 대사〔惠徹(慧徹) 大師〕가 밀인(密印)을 서당 지장 선사(西堂 智藏 禪師)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 대안사(大安寺)에서 개당(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스님도 …… 제자가 되려고 청하였다. 혜철 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하게 여겨 알뜰히 지도하였다. 무릇 이른바, 말이 없는 말과 법(法)이 없는 법〔法(無說之說 無法之法)〕을 허중(虛衆)에서 주고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23세 때 혜철 대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3) 대사가 이미 깊은 이치를 통달하고는 거처하는 곳이 일정치 않았다. …… 참선도 하고 …… 선지식을 친견하고 문법(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 신기한 기적(奇迹)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雞山)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玉龍寺)였다. 스님께서 유력(遊歷)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유승(幽勝함)을 좋아하여 당우(堂字)를 개수하고, …… 망언(忘言)하기를 무려 35년 동안 하였다. …… 제자가 항상 수백명(數百名)을 넘었다. …… 입적하였다. 때는 대당(大唐)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년, 898) 3월 10일이다. 향년은 72세이다.4)

우선 도선의 전기를 보자. 비문에 의하면 도선의 선대와 부조는 역사에 기록이 없다. 혹은 그가 태종대왕의 서손(庶孫)이라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승려가 될 징후를 보이다가, 마침내 15세인 문성왕 3년(841)에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한다. 20세인 문성왕 8년(846)에 동리산문에 나아가 혜철의 제자가 되었으며, 23세인 문성왕 11년(849)에 혜철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15년간의 운수행각을 거친 후에, 37세 때인 경문왕 3년(863) 희양현 백계산 옥룡사에 주석하고, 옛 절을 중수하여 35년간 동리산문의 선풍을 떨치다가 효공왕 2년(898)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5)

도선의 전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펴보자. ⑥ 태종무열왕의 서손(庶孫)이라고 하면서, 도선의 선대와 부조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도선 같은 위대한 승려의 출생 기록 치고는 너무 단조롭지 않는가. ⑦ 어머니의 성에 대해서도 이설이 많다. 최유청의 비문에는 강씨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최씨라고도 한다.6) ⑧ 도선이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에게 나아가서 법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선이 혜철을 만난 것은 기록에 의하면 846년이다. 이때 혜철의 나이는 62살이 된다. 혜철은 814년 입당하여 55세 때인 839년에 귀국한다. 동리산 산문을 개창한 시기는 63세 때인 문성왕 9년(847) 이후의 일이다. 즉 도선의 나이 20세 때에는 혜철이 아직 산문을 개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동리산문에 나아갈 수가 있었을까.7)

다음으로 도선의 선사상을 보자. 비문에서 보듯이 도선은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해서 교학[華嚴]공부를 했다. 그런데 한 해도 채 못 되어 화엄의 대의를 통달하니 도반들이 놀라고 칭찬하여 귀신같은 총명이라 했다. 그러나 20세가 되던 해 문자[華嚴]공부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동리산의 혜철에게 가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혜철이 그의 총명함을 가상히 여기어 지성으로 가르치던 중, 이른바 ‘말없는 말과 법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을 가르치니 도선이 환하게 깨달았다.

일단 우리는 위의 글에서 도선의 화엄 교학에 대한 이해가 지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5세에 화엄사에 출가해서 화엄공부를 했다. 그런데 한 해도 채 못 되어 화엄의 대의를 통달하니 도반들이 놀라고 칭찬하여 귀신같은 총명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선의 화엄교학에 대한 이해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8)

도선의 선법에 관한 자료가 너무 취약하여, 그의 선법이 어떠한 지에 대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았으리라는 것은 유추해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라는 표현의 앞뒤를 통해서 보여지듯이, 적어도 도선이 ‘선(禪)의 불가설성(不可說性)’이라는 조사선의 선지를 증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깨친 이후에 망언(忘言)하기를 무려 35년 동안이나 하였을 것이다. 둘째, 신라 교학불교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당시 새롭게 전개된 6조 혜능과 마조 도일 계열의 남종선[조사선, 홍주종] 사상을, 우리나라의 상황과 연계해서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남종선을 나말여초라는 격변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부처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우리 사람이라는 것을 표방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남종선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듣고 말할 줄 아는 바로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부처란 바로 면전에서 법을 듣는 이 사람이고,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람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禪)이란 도(道)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라, 중생의 전도된 견해를 교정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남종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학선(學禪)이란, 점차적으로 닦아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충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아무 문제가 없는 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이 된다.

약간 다르게, 도선의 선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펴보자. ⑨ 혜철의 법을 도선이 잇는 저간 사정과 도선의 선사상에 대한 내용이 너무 단조롭고 상투적이다. 우리가 도선의 선사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언명은 “혜철이 이른바 ‘말없는 말과 법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을 가르치니 도선이 환하게 깨달았다.”라는 표현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무설지설 무법지법’은 일찍이 혜철이 지장 대사를 찾아뵙고 올린 말씀으로 지장 대사는 이 말을 듣고 혜철에게 심인을 내린다. 이때 이 ‘무설지설 무법지법’이라는 언명은 조사선의 선지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있을까. 전후의 사정이 너무 단조롭고 상투적이며, 도선의 법기를 알게 해주는 그 어떠한 흔적도 없다. 다시 말해서 단지 혜철의 법을 도선이 이어받았다는 주장만 있을 뿐, 도선의 선사로서의 자세한 행적과 법통, 선문답 등이 지극히 간단하거나 아예 없는 것이다.9)

주) -----
1) 도선은 영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연극적인 인물이고, 텔레비전적인 인물이 아니라 라디오적인 인물이다. 그 결과 사후 그는 끊임없이 가탁(假託)되어지며 윤색(潤色)되고 포장되어져서, 고려왕실에서 대선사, 왕사를 거쳐 국사로 추존되는 등 늘 신화에 둘러싸여 등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런 여러 문제를 염두에 둔 이글은 도선에 대하여 문헌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접근하여, ‘역사적인 도선’을 논구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화된 도선’을 논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후대의 많은 이들이 도선을 가탁하거나 윤색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일정부분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2) 옥룡사(玉龍寺) 비문에는 도선의 출생년도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문성왕 8년(846) 당시 그의 나이가 20세이며, 72세로 입적한 연도가 효공왕 2년(898)이라 하므로 827년 생으로 추정된다.
3) 천도사(穿道寺)라는 설도 있다.
4) 이지관(李智冠) 교감역주(校勘譯註),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光陽 玉龍寺 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고려편(高麗篇) 3>, 가산문고(伽山文庫), 1996. pp.433~436.
5) 추만호(秋萬鎬), <나말여초(羅末麗初)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도선 연구》, 민족사, 1999. p.265.
6) 어머니의 성씨(姓氏)와 도선의 출생에 관한 자료는 다음을 참조. 이준곤(李準坤), <도선전설(道詵傳說)의 변이(變異)와 형성(形成)>, 《도선연구》, pp.298~304.
7) 정성본(鄭性本), <선각국사 도선 연구(先覺國師 道詵 硏究)>, 《도선국사(道詵國師)와 한국(韓國)》,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96. p.140.
8) 도선 뿐 아니라 구산문의 개조와 그 법손들 가운데에는 선문에 접하기 전에 먼저 화엄을 참학한 사람들이 많다. 주지하듯이 서당 지장 대사((西堂 智藏 大師, 735~814)의 제자로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조사인 도의(道義, 생몰미상)는 입당(783)하자마자 곧 오대산(五臺山)으로 직왕(直往)하여 문수(文殊)를 찾은 데서 원래 화엄종 출신임을 짐작케 하고, 이외에도 부석사(浮石寺)의 범체(梵體 )아래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도헌(道憲, 824~882)이, 석징(釋澄) 아래에서는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무염(無染, 800~888)이 각각 배출되었으며,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청(開淸, 854~930)은 화엄산사(華嚴山寺)를 거쳐 정행법사(正行法寺)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행적(行寂, 832~916)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을 탐구하며, 사자산문(師子山門)의 도윤(道允, 798~868)은 귀신사(鬼神寺)에서, 절중(折中, 826~900)은 부석사에서 각각 화엄학을 연수했다. 고익진(高翊晉),<신라 하대(新羅 下代)의 선전래(禪傳來)>, 《한국불교선문(韓國佛敎禪門)의 형성사 연구(形成史硏究)》, 민족사, 1989. pp.87~99.9) 정성본, 앞의 논문. p.148.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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