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단지 자기 집 속에서 자기 주인공을 분명히 보아서 외물(外物)에 뒤섞이지도 않고 생사에 끌려가지도 않아 홀로 우뚝하고 명백하게 드러나고 평안하여 속박된 것도 아니고 해탈한 것도 아니고 번뇌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라 종일 옷을 입어도 한 오라기 실도 몸에 걸친 적이 없고 종일 밥을 먹어도 한 톨의 쌀도 씹은 적이 없으며 심지어 화복(禍福)과 생사가 나뉠 때에도 언제나 이와 같이 한가로워 아무런 일이 없다. 이는 일을 마친 사람이니, 일을 마친 사람의 분상에서는 때로는 부처와 중생, 하늘과 땅을 가지고 하나의 작은 티끌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모든 것들이 제 자리에 있도록 내맡겨 두기도 하며, 때로는 모든 것들의 자리를 뒤바꾸기도 하여 일체에 자유자재하니, 이를 부사의대용(不思議大用)이라 하며 자재해탈(自在解脫)이라 한다. 해탈할 생사도 없고 증득(證得)할 열반도 없어서 임운등등(任運騰騰)하여 인연 따라 걸림 없이 사니, 이는 진실하고 명백한 하나의 본래면목이 안락하고 쾌활하며 명묘(明妙)하게 수용(受用)하여 생사에 오고 가는 것이 마치 문이 열려 사람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천당이든 불국토이든 모두 자기 마음대로 가서 더 이상 꿈과 허깨비 같은 몸과 마음의 괴로움에 속박되는 일이 없다. 이는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에 따라 고양이를 그려서 이러한 실제 경지를 밟도록 하라. 껄껄!

夫叅禪者, 不是特地之事, 秪是返照自家屋裏, 覰得自家主人公明白, 不被外物叅雜, 不爲生死互換, 孤逈逈地, 明白白地, 平妥妥地, 非繫縛, 非解脫, 非煩惱, 非涅槃, 終日着衣, 未曾掛一縷, 終日喫飯, 未曾齧一粒, 至於禍福生死之際, 亦皆如是任運無事. 此是了事人, 於了事人分上, 有時將佛與衆生, 乾坤大地, 作一微塵用; 有時任他, 各住其位; 有時易其位用, 得一切自在, 是名不思議大用也, 亦名自在解脫也. 無生死可脫, 無涅槃可證, 任運騰騰, 隨緣無碍, 箇是實實明明底一段本來面目, 安樂快活, 明妙受用, 往來生死, 如門開人出相似, 天堂佛刹, 摠自隨意, 更無夢幻身心苦相之可拘繫. 此是本有之事, 不是强爲者也. 請依此畵猫兒, 踏得恁麽田地也. 呵呵.

해설

‘시중(示衆)’이란 제목의 글로 대중에게 한 법문이다.

참선이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기가 본래 부처라 따로 해탈할 것이 없고 생사의 속박이 본래 없음을 깨닫는 것일 뿐이다. ‘이 말에 따라 고양이를 그린다’는 것은 법문에 따라 참구함을 비유한 것이다. 《선요(禪要)》에서 화두에 따라 참구하는 것을 비유하여 “당장에 화법(畵法)에 따라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하여 그리고 그려서 뿔과 얼룩무늬가 있는 곳, 심식(心識)의 길이 끊어진 곳, 사람과 법(法)을 모두 잊은 곳에 이르면 붓 끝 아래 산 고양이가 뛰쳐나올 것이다.”라 한 데서 온 말이다.

한암 중원(漢巖 重遠, 1876~1951)은 <일진화(一塵話)>에서 경허의 이 법문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대저 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특이한 일이 아니라 그저 현재의 한 생각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알아서 다시 외물(外物)의 모습에 섞이지 아니하고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이 없어, 일체의 경계에 동요하지 않음은 태산 반석과 같고, 청정하고 광대함은 저 허공과 같아서 모든 인연을 따르되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어, 종일토록 담소하되 담소하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오가되 오가지 아니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무위도(無爲道)를 길이 수용(受用)하는 것이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평등하게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니 누군들 여기에 들어올 분수가 없으리오. 어진 이나 어리석은 이나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가능한 일입니다.1)

이 법어는 원래 1935년 7월 19일 오대산 상원사에 대중을 위하여 상단 설법한 것이다. 역시 참선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 그 근원을 투철히 알아서 보고 듣는 사물에 끌려가지 않고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의 근원이 텅 비어 나라는 주체가 없음을 분명히 알면 모든 경계와 대립할 ‘나’가 없어 비로소 무위(無爲) 수행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내가 분별하는 대상 경계, 양변(兩邊)을 오가는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근세 퇴옹 성철(退翁 性徹)은 오매일여(寤寐一如)를 투과해야 견성이라 하면서 선문(禪門)의 견성을 높이 추상(推上)하여 모든 수행을 마친 묘각(妙覺)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와 같이 선(禪)의 깨달음을 지극히 높은 곳에 올려놓으면 어설픈 견성을 경계하고 수행의 강도를 더 깊게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자기 삶과 동떨어진 이러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실제로 가능하겠는가.

성철은 그의 저술 《선문정로》에서 오매일여(寤寐一如)를 투과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한 실례로 대혜 종고(大慧 宗杲)를 들었다. 그러나 대혜의 저술 중 우리나라에 많이 읽힌 《서장(書狀)》만 보더라도 대혜는 돈오점수를 주장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난날에 내가 “이치는 몰록 깨달으니 깨달음을 타고 한꺼번에 녹이지만 일은 점차 제거하니 차례로 다 없애야 한다.”라고 한 말을 행주좌와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2)

이 편지는 대혜가 이미 자신이 개오(開悟)를 인가한 탈공거사(脫空居士) 이병(李邴)의 편지에 답하여 오후(悟後) 보임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치는 몰록 깨달으니 깨달음을 타고 한꺼번에 녹이지만 일은 점차 제거하니 차례로 다 없애야 한다.”라는 말은 《능엄경》 10권에서 나온 말로 보조(普照)의 《수심결(修心訣)》에도 보인다. 경허의 선(禪)은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계승하였다.

대혜는 또 유자우(劉子羽)에게 답한 편지에서 “이 일착자(一著子)는 얻기는 쉽고 지키기는 어려우니,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말라.”3) 하였다. 역시 오후 보임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이다.

대혜 뿐만이 아니라 성철이 《백일법문》에서 오매일여를 투과한 선사(禪師)로 예시(例示)한 또 다른 선사인 몽산 덕이(蒙山 德異)도 돈오점수를 주장했으며,4) 중국의 대표적인 위앙종(潙仰宗) 조사(祖師)인 위산(潙山)도 “내가 참선을 여러 해 했지만 지금까지 유주상(流注想)을 끊지 못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5)

무릇 세상 이치는 얕게 보아도 모르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깊게 보아도 오히려 진리를 여실(如實)히 보지 못할 수 있다.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이 선(善)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은 자기 본성이 성인과 다름이 없음을 확인하고 믿어야 향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렇지 않으면 선(善)·악(惡)의 양쪽을 오락가락할 뿐 영원히 제 자리를 벗어나 향상할 길이 없다. 반드시 선해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꼭 같지는 않겠지만 선(禪)의 개오(開悟)도 이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본래 공(空)한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참으로 수긍하면 외물(外物)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있는 바탕이 갖추어져 향상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 경계를 반연(攀緣)하여 자기를 모른 채 보고 듣는 사물을 쫓아다니는 ‘미기축물(迷己逐物)’의 미망을 벗어날 통로가 열리지 않는다. 선(禪)의 개오는 여기까지이다. 이를 넘으면 참으로 특별한 일이 되고 만다.

주) -----
1) 한암(漢巖) 《한암일발록》 상권, pp.46. 원문은 국한 혼용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가 쉽게 풀이하였다.
2) 《서장(書狀)》 <답이참정(答李參政)>, “前日之語: ‘理則頓悟, 乘悟併銷; 事則漸除, 因次第盡.’ 行住坐臥, 切不可忘了.”
3) 《서장(書狀)》 <답유보학(答劉寶學)>, “這一著子, 得易守難, 切不可忽.”
4) 몽산(蒙山) 덕이(德異), <몽산화상보설(蒙山和尙普說)>, “以道除心意識, 叅絶聖凡路學, 卒地斷, 嚗地折, 便異於學解之流. 理須頓悟, 事卽漸修. 多生習氣, 焉能頓盡?”
5) 정민정(程敏政), 《심경부주(心經附註)》 2권, 학민문화사, 1995, pp 112. “佛家亦有所謂流注想, 他最怕這箇. 潙山禪師云: ‘某參禪幾年, 至今不會斷得流注想.”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