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명에 순응하라?

만약 당신이 말기암 진단을 받고 시한부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대개는 처음엔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만, 조만간 그 모든 게 부질없음을 깨닫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반드시 당하고야 말 운명에 대하여 버둥거릴수록 점점 사태가 악화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그물에 걸린 새가 날개를 퍼드덕거릴수록 더욱 사로잡히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최상의 길은 오직 신의 뜻에 순종하며 조용히 누워 “신의 예정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신앙으로 태연자약하는 것이다. — 세네카, 《행복론》

세네카의 말대로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최상이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른다면, 쓸데없이 엉뚱한 데에 힘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힘들게 할 것이다. “운명은 순종하는 자를 인도하고 거역하는 자를 강제한다.”1)고 하지 않았는가. 거역한들 결국 강제로 끌려가 참혹한 최후를 맞이할 뿐이다. 차라리 운명에 복종함으로써 우아한 종말을 기대하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였을까? 초기 스토아 철학자 중에 “신이 나에게 몹쓸 병을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그 병을 추구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려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현하려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예언. 곧 신의 명령이며 주어진 운명을 따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튼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어떻게 하든 운명이 실현되는 과정을 구현한다. 피할 수도 숨을 데도 없는 운명을 말이다.

2. 사려 깊은 사람은 운명을 비웃는다

이 모든 것의 시작(arche)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 깊음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운명—어떤 이들은 운명을 만물의 여주인이라고 불렀지만—을 비웃으며, 우리의 행동—이들 중 어떤 것은 필연에 따라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서, 또 다른 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 생겨난다—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 에피쿠로스, 〈메모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2)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2?〜BC 271)는 사려 깊은 사람을 빌려 운명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들의 행동을 결절할 힘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비친 세네카와 같은 스토아철학자들은 생각이 매우 부족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신이 두렵지 않았을까?

가장 먼저, 신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이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듯이, 신이 불멸하며 축복받았다고 생각하라. 또한 그의 불멸성과 이질적인 것, 그리고 그의 축복받음에 잘 맞지 않는 것을 신에게 귀속시키지 말라. 왜냐하면 신에 대한 우리의 앎(gnosis)은 분명하므로,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비일관적인 방식으로 신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한편 불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신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들에게 대중들의 견해를 귀속시키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신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주장은 감각들로부터 생기는 일반 개념이 아니라, 잘못된 추측이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잘못된 추측에 따르면, 악한 자들에게 가장 큰 불행이 생기는 반면, 선한 자들에게는 신들로부터 가장 큰 이로움이 생긴다.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된 추측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항상 자신에게 고유한 탁월함에 익숙해져, 자신과 비슷한 것은 받아들이는 반면,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메모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3)

먼저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신은 일반적으로 믿는 초월자,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전능자의 모습은 아니다.

먼저 그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신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의 관념 속에 신이 있으므로 신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근대철학자 데카르트가 먼저 생각하는 인간을 제1원리로 정립하고 그런 후에 인간의 본유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한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는 데카르트에 의해 열린 근대 철학, 그 인간의 주체성을 데카르트보다 훨씬 먼저, 대략 2천여 년이나 앞서서 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멸과 축복은 영원하며 좋은 것에 신성이 부여된다면 그 신성은 긍정해도 좋다는 의미이겠다. 그런 후에 신성은 온전히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한다. 대중이 생각하는 신, 즉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는 불행을 겪게 하는 신은 잘못된 추측이다. 사려 깊지 못한 대중이 만들어낸 못된 신이다. 단연코 그런 신은 없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번개를 일곱 번 맞은 사람이 나온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신이 내린 벌이라면, 이 사람은 일곱 번이나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대중의 어리석음에 편승하여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종교인들이야말로 추방해야할 죄인이다.

3. 클리나멘, 아주 작은 이탈, 큰 자유

우주의 본성은 물질과 허공(kenon)으로 이루어진다. — 에피쿠로스, 〈자연에 관하여〉4)

▲ 에피쿠로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유물론, 비결정론, 자유의지, 쾌락주의 등이다. 이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쾌락주의이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이다. 그는 고대 희랍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데모크리토스와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는 우주는 무한히 많은 원자들—원자라고 번역한 희랍어 아톰(atom)은 나눌 수 없다는 뜻이다—과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자들이 허공을 떠다니며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면서 사물이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보았다.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원자들 중 어떤 것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어떤 것은 비스듬히 떨어지고 다른 것들은 충돌해서 위로 튕긴다. 그리고 튕겨나가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반면, 어떤 것들은 다른 원자들과 엉키거나 주위를 둘러싼 원자들에 갇혀서, 한 곳에 정지해서 진동한다. — 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5)

원자들의 운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스듬히 떨어지는 것이다. 비스듬히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충돌하게 되고, 충돌로 말미암아 튕겨나가 다른 것들과 엉키거나 갇히게 된다. 그렇게 삼라만상은 변화한다. 이 부분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진술은 보다 더 구체적이다.

물체들이 자체의 무게로 인하여 허공을 통하여 곧장 아래로
움직이고 있을 때,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의 장소에서 자기 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비껴났다는 것을.
하지만 만일 그들이 기울어져 가 버릇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아래로,
마치 빗방울들처럼, 깊은 허공을 통하여 떨어질 것이고,
충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타격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들에게는, 그래서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했을 것이다.6)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BC 55)는 에피쿠로스보다는 250년 정도 후에 태어난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경도되어 6권으로 된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썼다.

위 인용시에 의하면 원자(물체)들은 자체의 무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허공에서 수직낙하하며, 단순한 수직낙하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는 특정하지 않은 시간, 특정하지 않은 장소, 즉 아무 때 아무 곳에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약간의 비껴남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를 클리나멘(Clinamen)이라고 한다. 이탈이란 의미를 갖는 이 단어는 예측불가능성이 원자의 본성임을 나타낸다. 아주 작은 이탈, 미세한 차이, 혹은 어긋남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이 더해져 삼라만상의 변화를 설명한다. 기가 막힌 비결정론이다. 여기에 이르면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는 물론이려니와 스토아학파를 위시한 일체의 결정론이 무기력해진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무용가 데이지의 삶을 바꾼 교통사고는 일련의 작은 일들이 모여 발생한다. “만약 단 한 가지만이라도 다르게 일어났더라면…… 그 운동화 끈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택배트럭이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더라면…… 그 남자가 알람에 맞춰 5분만 일찍 일어났더라면…… 택시 기사가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가 자기 코트를 잊지 않고 나와서 앞의 택시를 잡았더라면…… 데이지와 그녀의 친구가 그 길을 건너지 않고 택시가 지나갔더라면……”‘7)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비껴남으로써 운명의 법을 깨뜨릴
운동의 어떤 시작을 이루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서 이 자유의지가 온 땅에 걸쳐 동물들에게 생겨나 있는 것이며,
묻노니, 대체 어디에서 운명으로부터 빼앗아낸 이 의지가 생겨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쾌락이 각자를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에 공간적으로 정해진 자리에서가 아니라,
정신 자체가 이끌어간 그곳에서, 그때에 운동의 방향을 바꾸는 것일까?8)

자유의지는 시초를 상정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최초의 원인자를 우리의 정신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는 신일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와 사건의 궁극적 원인. 곧 신이 아니고서는 밖에서 찾을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그 자신은 변화ㆍ운동하지 않으면서 다른 일체의 변화와 운동을 야기하는 최초의 원인자도 결국엔 신과 합하고 만다.

하지만 만약 외부의 신을 인정할 수 없다면, 결국 모든 변화의 주체는 나 자신이며, 나의 정신이며, 자유로운 의지일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자유의지를 높이 들어 올린다. 그와 동시에 운명의 법칙을 깨뜨린다. 필연적인 신의 섭리는 부정되고 예언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4. ‘정원’엔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였다

모든 것이 필연에 따라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이론에 대한 부정도 필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단장》9)

예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예언이 존재하더라도, 예언에 따라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에피쿠로스, 《간략한 요약》10)

필연, 혹은 운명이란 이름 앞에 우리는 먼저 주눅부터 든다. 예언이라면 그 무게에 깔려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마치 고삐 매인 소처럼 힘없이 끌려갈 것이다. 정해진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만 하는 게 현세적 삶이다. 물론 신앙인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무한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다만 그 기쁨은 등산을 갔다가 벼락을 맞은 사람은 분명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는 사려 깊지 못한 추측과 함께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어이없는 억측과 근거 없는 자기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
모두의 눈앞에서 땅에 비천하게 누워 있을 때,
그 종교는 하늘의 영역으로부터 머리를 보이며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위에 서 있었는데,
처음으로 한 희랍인이 필멸(必滅)의 눈을
감히 맞서 들었고, 처음으로 감히 맞서 대항하였도다.
그를 신들에 대한 소문도, 벼락도, 하늘도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으로도 억누르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만큼 더
그의 의지의
날선 용기를 자극하여, 그는 자기가 처음으로 자연의 문의
굳게 맞춰진 빗장을 부숴버리기를 갈망하게 되었도다.
그리하여 정신의 생명력 있는 힘이 승리해 나갔고, 그는 세상의
불타는 벽을 벗어나 멀리까지 나아갔도다.11)

종교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혼에 무거운 족쇄를 채울 때, 에피쿠로스는 종교를 상대로 싸웠다. 그 대가로 그는 엄청난 비난과 중상모략을 받아야 했다. 그럴수록 에피쿠로스의 신념은 확고했고, 그의 가르침은 점점 퍼져나갔다. 기원전 306년 아테네에 만든 ‘정원’엔 그와 그의 벗들이 모여 배움을 나누었다. 정원은 아테네 시민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예, 그리고 외국인과 창녀도 받아들였다. 아무런 차별도 없이 그들은 벗이 되어 우정을 나누고 즐거움을 함께 했다. 즐거워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일생동안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sophia)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 — 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12)

나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선(agath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에피쿠로스,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13)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41년 플라톤이 죽은 지 7년이 되는 해에 희랍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나서, 기원전 270년 72세를 일기로 아테네에서 죽었다. 그는 방광에 생긴 결석으로 죽기 전까지 14년을 끔직한 고통 속에서 살았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이도메네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의 생애 중 이렇게 기쁜 날에, 즉 내가 죽으려하고 있을 때, 나는 너에게 이 편지를 쓴다. 나의 방광과 위의 질병이, 그 본성적 고통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할 때 나의 마음은 기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14)

주) -----
1) 세네카, 《행복론》
2) 에피쿠로스, 오유석 옮김. 《쾌락》
3) 위의 책
4) 위의 책
5) 위의 책
6)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7)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8)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9) 에피쿠로스, 오유석 옮김. 《쾌락》
10) 위의 책
11)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12) 에피쿠로스, 오유석 옮김. 《쾌락》
13) 위의 책
14) 위의 책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