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남 변호사

사람들은 묻는다. 조계종 자정활동을 왜 하고 있냐고.

2006년 조계종 법률전문위원을 그만 둔 이후 9년여를 뛰어들까, 이대로 지켜볼까를 고민했다.

어디나 부처님법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어머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계종에 취직했다. 그리고 조계종이란 직장을 떠나기 전후 한동안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던 적도 있었다.

필자가 조계종에 취직했던 2,000년대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렸고, 대한민국에서는 벤처기업 붐, 저축은행사태 등으로 눈먼 돈이 뜬금없이 흘러 다니고, 시행업자와 브로커, 주가조작 등으로 돈을 번 이 들이 유흥가를 밤새 휘어잡던 시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옛날 집 한 채 가격 이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고, 사찰 주변에도 뭉치 돈이 어렵지 않게 보였다.

이 악몽의 2,000년대에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은 것 마냥 조계종은 세속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들었고, 그 당시 벌써 큰스님이 되어 버린 94년 개혁세력은 세속의 정치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권력 암투에 치중했으며, 개혁세력 구세력 할 것 없이 흥청망청 남의 돈을 쓰는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2001년 신밧드 룸싸롱 술자리에 참여하였던 당시 봉은사 주지이자 과거 개혁파의 일원이 불음계 위반, 국고보조금 사기 문제 등으로 철저히 무너진 것을 보라.

결국 개혁세력은 악몽의 2,000년대 이후 서로 간, 그리고 구세력에 약점과 발목이 잡혔다.

신자유주의의 망조가 확인되었던 2,000년대 말과 조계종 총무원장의 자리는 이러한 종단의 분위기를 다잡아야할 불교역사상 가장 소중한 지점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소명의식은 없고 위선에 익숙한 자의 도움으로 “그들이” 사자의 갈기와 이빨을 가진 완벽한 몸으로 돌아왔다.

1994년 2월 그들은 관악산 연주암을 폭력으로 물들였다. 수배 중이던 한 명은 도주하고 또 한 명은 연주암을 차지하여 승리를 만끽했다.

▲ 94년 2월 초의 연주암 전경. 아래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현 자승 총무원장이다. 위 사진에서 자승 총무원장의 왼편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붉은색 모자를 쓴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띠었다. 그 때문인지 북파공작원 출신들이 절 뺏기에 참여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랬던 그 들이 2004년 화엄회로 힘을 합쳤다. 거래와 싸움에 능숙하고 종단정치를 휘어잡을 수 있는 돈이 있으며, 특히 스님 특유의 부끄러움이 없었던 그들을 앞으로 당해낼 승려들은 없었다.

2005년 천년고찰 경내 실내골프장 건설, 해외 원정도박으로 인한 환치기, 호화요트 구입 등을 이슈로 불교시민 단체가 역량을 모아 그들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지금 해종언론 규탄 성명서와 우희종 교수 규탄 성명서를 내고 있는 조계종 중앙신도회도 이 대열에 합세하였고, 당시 총무원은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각자의 이유로 그들의 지원이 필요했던 개혁세력은 이 대열에 힘을 보태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평생 양보를 해 본 적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으며, 자기의 이해 관계와 배치되지만 않는다면 신도숫자가 줄던지, 신규 출가자가 사라지든지 관심이 없다.

2,000년대 말부터 종단을 완전히 장악한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확대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을 자발적으로 포장해주는 이까지 있었으니, 사자의 위엄을 갖추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필자가 자정운동을 오래했을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필자가 자정운동에 뛰어든 것은 불과 2년도 되지 않는다.

가까웠던 이들과 등을 돌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스님들 스스로 교단에 대한 먹칠을 중단시키려는 움직임을 갖기를 소망했다.

결국 스님들 스스로의 움직임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 스님들이 애초부터 그들을 당해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리였다.

필자를 아끼고 애정을 주셨던 역대 총무원장 스님들의 은혜를 갚는 길은 망하기 직전의 총무원장이었다는 오명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순진하고 부끄러움 많은 일반 스님들이 그들에게서 일방적으로 밀리며 입을 상처와 무기력한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겠다 결심하며 뛰어들기로 했다.

그들은 종교가 무엇이든 또 얼마나 이상한 세계관을 갖고 있는 지 관계없이 이득이 된다면 누구와도 친분을 갖고 의탁하는 재주가 있으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돈이 풍부하거니와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그들은 필자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영원한 기득권자로 남을 것은 분명하다.

미약한 필자의 힘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을 방법도 없고, 빼앗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들이 위선적으로 사자의 위엄을 가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불교를 싸구려 종교로 만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불교발전의 미래를 구상하고 관철시킬 총무원장을 만들어 보자.

이번 말고 또 기회가 있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출가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다 성직이 직업화되고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을 기득권 확보를 위한 호기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하면 이젠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오랫동안 아무런 비젼과 자정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조계종단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차가울 정도로 싸늘해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사실상 복권된 현 상황에서 94년 개혁세력은 헛살고 낭비한 지난 20년을 발로 참회하고 이 마지막 기회를 털끝 하나 아끼며 주워담기 바란다.

약자끼리 싸우지 말자. 필자는 중앙신도회 감사로서 신도회 조직이 형해화되어 있고 심지어 포교의 대상도 없다는 것을 꾸준히 지적했다

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그들의 외호에 본인들의 정체성까지 모두 사그러뜨릴 것인가. 우희종 교수가 그들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도 아니고, 본인들의 극복 대상도 아니다. 봉은사 야간 신도회가 모두 해체될 때 봉은사 신도들은 중앙신도회에 애타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외면당했다. 현실은 신도들을 외면하고 극복 대상에겐 약하고 주체적 신도상을 주장하는 사람에겐 투쟁적이다.

그들은 결코 약자 편을 들지 않는다. 한상균 위원장 체포 이후에 그들과 그들을 포장하는 이들이 약자의 문제 제기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편들었는가를 보라. 그들이 약자를 보호할 의사와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교단자정센터 토론회에 참석한 민주노총 측에서도 밝히지 않았는가.

총무원장 한 번 잘 바꾸어보자. 그리고 아끼어 두었다가 그때도 누군가가 변태불교라고 하면 그 때 같이 신나게 화내보자.

김형남 |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운영위원장, 신아법무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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