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붓다의 메시지》는 두 권 분량으로, 두 분 광명 만덕 스님과 자재 만현 스님이 쓴 책이다. 저자의 불명, 자재(自在)와 광명(光明)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 불명을 합치면 바로 부처님의 현존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오랜 동안 수행을 하신 분이고 수행 체험의 결과를 여법하게 진술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글은 믿음과 생명력으로 넘친다. 산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이어서일 것이다. 두 스님은 옛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초기 경전)이 ‘신화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가령 육도(지옥도, 축생도, 아귀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윤회도 인간세계의 실상을 비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주의 이법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불국토는 부처님께서 시설해놓으신 세계로 현존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님들은 인간에겐 영혼/영체라는 게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누누이 이르신다. 이로 인해 비로소 윤회의 주체가 성립되는 것이니까. 영체란 빛과 같은 성질을 지녔다고 한다. -이는 스님의 경험적 추론이리라. 물리학적으로 저자가 규명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딴은 깊은 삼매에서 영적 메시지를 받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테가 그의 대작 《神曲》을 지을 때, 어떤 ‘환상’에 몰입이 되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세계를 묘사했듯이. 그리고 당대의 천재 과학자 스웨덴보리의 《천국과 지옥》도 그가 기도를 하던 중, 저도 모르게 이끌려져가 천국과 지옥의 광경을 보고 쓴 체험담이었듯이. 최근엔 다스칼로스의 성자나 현인 데이비드 호킨스가 천국과 하나님의 실재를 증언했듯이. 두 스님 역시 삼신(법신.보신,화신)의 현전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리라. 생각건대 윤회의 실상을 보지 않고서는 그렇게 증언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초기 불교경전에서 육도 윤회의 실상을 비유로만 해석하면-그렇게 해석이 될 수도 있지만, 경전 해독에서 한참 한계를 느낄 밖에 없다. 육도 윤회를 부정하면 불교 자체는 존립기반을 잃을지도 모른다. 허나 육도 윤회를 실제 현상으로 받아들이면, 초기 경전에 대한 이해가 한층 수월해지고 인간이 마음을 닦아야만 하는 이유가 온전히 성립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윤회설을 부정하게 된 배경은 과학 정신에 위배가 돼서일 것이다. 윤회설은 객관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는, 하나의 믿음체계로서만 취급되었다. 과학이란 무릇 물질계의 선형적 인과관계만을 중시하기에, 비선형적/영적 앎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방법상 접근하기가 어렵다. 윤회설은 철학적으로 논증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는 주제다.

철학은 이성적 차원에서 언어를 정치하게 배치해야 하는 일이라서 영적인 앎에 대해 언어상의 논리를 통해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명상/영적 활동이 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겨우 얼마 안 된 얘기다. 양자 물리학이나 끌개장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인류는 뉴튼식 패러다임에 젖어, 인류의 오랜 영적 전통을 미신이나 오류 또는 신화의 일부로 취급해왔다. : 인류는 오랜 세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왔다.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카르마와 윤회와 궁극적 실재에 대한 믿음은 상존해왔다. ; 예수는 엘리아가 세례요한으로 돌아왔다고 말했을 때 환생을 인정했다.(마태복음 11:7-14, 17:10-13) 예수의 목적은 신과 하늘나라의 실상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슬람의 수피즘도 천국과 윤회를 말한다.

역사상 붓다만큼 세밀하게 윤회의 실상을 설하신 분은 없다. 현대판 성경이라 할 수 있는 《기적 수업》에서, 예수는 에고(Ego)의 해소로 각자는 카르마(業)의 종말을 맞게 된다 하며, 이로 인해(윤회로 고통 받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천년의 시간을 단축시킨다고 했다. 에고의 해소란 금강경에서 이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킨다는 말과 같은 뜻의 말이다.

선불교에선 깨달음, 곧 공체험을 중시한다. 실상 공체험은 수행의 목적이다. 그러나 스님은 이것만으로는 실재와의 온전한 계합을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인간은 몸을 갖고 사는 이상, (온전히 깨달았다 해도) 미세한 번뇌는 작동되기 마련이다. 해서 부처님이 도달한 도저한 궁극의 경지에는 이르기가 어렵다. 스님은 공에서 칭명염불로 더 나가라고 독려하신다. 향상일로(向上一路), 그 흐름 속에 들어가 간절하게, 오로지 ‘나무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을 청해야 온전해지리라. 신심을 더욱 북돋게 해주는 법문이었다.

-블레스병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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