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 삶의 흔적있는 세계적 역사문화도시
 성급한 발굴 · 개발보다 천년풍류 느끼게 할 일

보름 뒤 경주에서 국제PEN한국본부 주최의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 국제적인 문학행사가 개최된 것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세계한글작가대회는 ‘한글과 한글문학의 세계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글 사용 인구는 남북한 인구와 재외동포,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 등을 모두 합쳐 대략 9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숫자는 전세계 인구의 약 1/70에 불과하고, 영어나 중국어 사용자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은 숫자도 아니다. 지난 5월 한강의 《채식주의자 THE VEGETARIAN》가 맨부커 인터내셔널부문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문학과 한글의 세계화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행사에 초대된 동포문인은 모두 한글로 글을 쓰는 이민1세대이다. 이들은 50대 후반에서 70대에 이르는 중노년층인 데다 후속세대들이 아무 관심이 없어 재외동포 한글문학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걱정스럽다.

지난 해, 많은 해외동포작가들이 자비(自費)로 경주에 온 가장 큰 이유도 자신의 창작행위가 조국의 대표적 문학단체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행사 마지막 날, 그들 중 일부는 내년에도 꼭 오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며 새벽까지 술잔을 주고받았다.

흔히 경주를 천년고도(千年古都)라 한다. 경주를 거점으로 건국한 신라는 BC57년부터 935년까지 992년간 존속했고, 그 이후 1100년이 흘렀으니 천년고도란 말이 적실하다. 오랜 역사와 문화유적을 지닌 도시가 그렇듯이 경주는 근대화의 물결에서 늘 비껴 있었다. 그것은 경주 곳곳에 천년 전 신라왕족의 능(陵)이 즐비하고, 땅속에 신라인들의 삶의 흔적이 매장되어 있어 함부로 파헤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 역사문화도시에 산다는 긍지로 온갖 불편을 감내해온 경주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경주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 이상 방문하는 명소다. 어려서는 학교의 수학여행으로, 부모가 되어서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그리고 젊은 시절 친구 혹은 연인과 들르는 곳이 바로 경주다.

나는 중학교 때 집이 가난해 경주수학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선생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결혼한 뒤 처자식과 함께 두어 차례, 몇 년 전 가까운 지인부부와 경주 일대를 돌며 경주의 매력과 가치를 새삼 곱씹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놀고 즐기느라 경주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별 관심이 없고,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도 별로 즐거울 게 없다. 그러나 조금 나이 들어 거리와 여유를 가지고 경주를 거닐면 이런 엄청난 문화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다. 어느 외국인은 서울에서 불과 두어 시간 거리에 이런 고도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나 로마, 런던과 파리를 열심히 찾으면서도 정작 경주에 대해서는 별로 감격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최근에 ‘경주 신라왕경(王京) 복원사업’ 계획이 발표되었다. 2035년까지 1조5천억 원의 예산을 들여 왕릉 등을 발굴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문화재 발굴이나 개발은 다른 어떤 사업보다 신중하고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지금 경주는 지방소도시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는 세계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가 할 일은 왕릉을 파헤쳐 유물을 발굴•전시하는 게 아니라 세계인이 경주에서 편하고 자유롭게 산책하며 천 년 전의 풍류를 느끼게 하는 일이다. 아내를 홀로 잠들게 할 만큼 밝은 달빛 아래 왕릉 사이를 거닐며 월명의 피리 소리를 듣고 생사(生死)의 이치를 사색하게 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동국대 교수 · 문학평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