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암(天藏菴)이 좋으니 한 쪽은 산이요 한 쪽은 바다입니다. 비록 이러하지만 유람객이 오지 못하는 곳일 뿐 아니라 식견이 트인 통인(通人)·달사(達士)도 찾아오지 못합니다. 통인·달사들만 찾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부처와 조사도 여기서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니, 괴롭고 괴롭습니다. 이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대목이겠습니까.

들은 바로는 병을 앓으신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수행인이 마군을 항복하는 곳이며 정신을 바짝 차릴 곳이며 몽환(夢幻) 경계에 유희하는 곳이니, 근심하고 기뻐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병은 마음으로부터 생기고 마음은 아지랑이 같은 것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경허는 배고프면 배고프다 말하고 추우면 춥다 말할 뿐이요 그 밖에는 잠이나 잘 뿐 전혀 수행하는 상(相)이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두세 선객(禪客)이 있어 산야의 노래를 함께 부르니, 이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이곳을 찾아오실 의사가 있다고 하니, 내년까지 기다릴 게 있겠습니까? 겨울 날씨가 몹시 추워 왕래하기 어려우니, 날씨가 화창할 때가 되거든 좋은 인연을 잊지 말고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天藏庵好, 一面山, 一面海. 然雖如是, 非但翫景者不到處, 通人達士亦不交涉; 非但通人達士不交涉, 佛也祖也猶較些子. 苦哉苦哉! 是豈可言處. 所聞道候以病, 此迺修行人降伏魔軍處也, 驚覺精神處也, 遊戱幻境處也. 何足以憂之喜之哉? 況病從心生, 心如陽燄者乎! 鏡虛飢則言飢, 寒則言寒, 餘外睡而已, 了無修行相狀. 而幸有二三禪侶, 共唱和山歌野曲, 幸何可盡達? 又聞有垂訪之意思, 何待明年? 冬候寒嚴, 往來難通, 則幸當風日熙和時, 不忘好因緣乎?

해설

이 편지는 경허가 천장암에 머물 때 쓴 편지로 요사한(了事漢)의 임운등등(任雲騰騰)한 일상을 잘 보여준다.

<천장암 중수기(重修記)>에 의하면, 경허의 속가 형님인 태허(泰虛) 스님이 이 암자에 주지로 와서 경진년(1880)에서 병술년(1886)까지 6년 동안 시주를 모아 대문을 세우고 부엌간을 지었으며, 18정보의 산림과 종(鐘)도 시주를 받았으며, 퇴락한 건물을 수리했다고 한다. 천장암 편액과 인법당의 주련은 당시의 명필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글씨이다. 이 천장암에서 태허와 경허, 그 누이 삼남매는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 朴氏)를 모시고 살았다. 일가족이 한 가정을 이루었던 셈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경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안에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칠까 염려하여 멀리 출타하지도 않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영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승려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삶에 철저했던 경허의 진실한 인품이 느껴진다.

자암 거사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암(慈庵)이란 호는 승려가 씀직한 호이지 일반 선비가 쓰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혹 속퇴한 승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불교 수행을 하는 거사(居士)이다.

천장암은 충청남도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숨어 있다. 그러나 암자 앞으로 조금 걸어가 경허(鏡虛)가 가서 앉곤 했던 연암(燕巖), 즉 제비바위 위에 서면 멀리 안면도 앞 서해바다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서 경허는 ‘한 쪽은 산이요 한 쪽은 바다’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뒤를 이어 경허가 말하는 천장암은 뒤에는 산이 감싸 안고 앞에는 바다가 펼쳐지는 땅 위의 천장암이 아니다. “유람객이 오지 못하는 곳일 뿐 아니라 식견이 트인 통인(通人)·달사(達士)도 찾아오지 못합니다. 통인·달사들만 찾아오지 못할 뿐 아니라 부처와 조사도 여기서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니, 괴롭고 괴롭습니다. 이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대목이겠습니까.”라고 한 말은 저 여말(麗末)의 선승(禪僧)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태고암가(太古菴歌)>에서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몰라라. 깊고 은밀하나 옹색하지 않네. 천지를 감싸 안아 방향이 없어 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吾住此庵吾莫識 深深密密無壅塞 函盖乾坤沒向背 不住東西與南北].”라 한 경계와 다르지 않다. 즉 경허 자신의 깨달은 마음 경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 천진하고 말쑥한 경계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진여(眞如) 아님이 없어 부처도 조사도 설 땅이 없다. 거머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내 마음,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르래야 모를 수 없으니, 언어로는 형용할 길이 없다. 눈앞에 이토록 분명하건만 이 경계를 일러줄 수 없으니, 괴롭고 괴로운 것이다.

경허는 병을 앓고 있다고 한 자암 거사에게 병은 마음에서 온 것이고 마음은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한다. 마음이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병 또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추우면 춥다 할 뿐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선(禪)에서 수행은 성한 살갗에 생채기를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수행을 잘한다 할지라도 본래 청정한 본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수행하는 바 없이 수행할 줄 아는 것이 오후보임(悟後保任)이요 참다운 수행인 것이다. 경허가 천장암에 보임하던 시절의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경허는 김[海衣]을 좋아했는데 경허가 먹다 남긴 김을 그의 누이가 그릇과 상을 치우다가 마저 먹어버렸다. 경허가 어린아이처럼 먹다 남긴 김을 찾으니 누이가 “내가 먹었으니 찾지 마시오.” 하였다. 경허가 “저런 못된 년 같으니라고. 네가 왜 내 먹던 것을 먹었느냐?” 하며 쫓아가서 누이의 머리채를 쥐고 때렸더니, 누이가 “이 망할 녀석은 어렸을 때에도 걸핏하면 나를 잘 때리고 덤벼들고 하더니 커서도 그 버르장머리를 버리지 않는단 말인가.” 하며 두 다리를 뻗고 엉엉 울었다. 그러자 경허는 “얘 그럼 울지 마라. 김 한 장 더 줄게.” 하며, 김 몇 장을 갖다 주면서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릿광대짓을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제자와 납자(衲子)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경허 스님이 아니고는 이런 동심의 천진행(天眞行)을 볼 수 없다 하면서 더욱 놀랐다. 이것이 이른바 도인의 영아행(嬰兒行)이다.

경허는 천장암에서 보임하며 세상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은 물론 승속(僧俗)의 경계도 잊은 채 형님 누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단란하게 살았다. 이러한 경허의 삶에서 우리는 진실한 수행은 수행을 가장하지 않고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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