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 계열의 대표적인 선사(禪師)이며 우리나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원조로 받들어지는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898)은 동리산문의 개창조 적인 혜철(寂忍 慧徹, 785∼861)의 인가를 받고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서 독자적인 선풍을 일으킨 인물로 회자(膾炙)된다.1) 그러나 주지하듯이 도선 관계 사료의 정확성 여부에 대한 문제는 현재 학계에서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도선에 대한 자료가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비판적인 입장에서 살펴 볼 때, 자료들 거의 모두가 태생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 주지하듯이 학계에서는 이 중에서 고려 의종 4년 최유청이 왕명에 의거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이 가장 상세하고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여긴다. 이 비문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최유청이 비문을 찬술하게 된 인연, 둘째 도선의 전기와 선사상, 셋째 도선과 풍수지리설과 관계, 넷째 도선과 태조 왕건과의 관계, 다섯째 찬문(讚文)이다.

우선 최유청이 비문을 찬술하게 된 인연을 보자.

㉠ (고려 18대) 의종 임금께서 보위(寶位)를 이은지 4년째(1150) 되던 10월 신유(辛酉)에, 신(臣) 유청(惟淸)에게 조칙으로 명(命)하여 이르기를, “선각국사는 도덕이 고매할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업(功業)도 가장 많아서, 우리 조종(祖宗)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계(法階)를 봉증(封贈)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대사(大師)에게 존중함이 지극하였다. 그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을 아직 비문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짐(朕)이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인고(仁考, 부왕 仁宗)께서 이미 경에게 명(命)하여 비문을 찬술(撰述)케 함은 그것은 곧 국사에 대한 지극한 공경을 표한 것이다.” 하셨다. 신이 왕명(王命)을 받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물러나와 그 행장(行狀) 자료를 살펴 사실(事實)의 자세한 내용을 얻고는 차례로 기술하였다.3)

㉡ 어느 날 홀연히 제자(弟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 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도리(眞理)의 상도(常道)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世上)에 거(居)할 수 있겠는가” 하고 …… 입적(入寂)하였다. …… 문인(門人) 홍적(洪寂) 등이 선사(禪師)의 빛나는 행적(行跡)이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표상(表狀)을 올려 누구를 시켜 비문을 짓도록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이에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朴仁範)에 명(命)하여 비문(碑文)을 지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4)

비문 ㉠은 고려 18대 의종이 국가에 공업(功業)이 가장 높은 선각국사 도선의 행적이 도선 입적(898)후 252년이 지난 의종4년(1150)까지도 문장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비문을 찬술하라고 최유청에게 명령을 내리는 전말을 다루고 있다. 또 이미 부왕의 명령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 비문 ㉡은 도선이 입적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입적 후 제자 홍적 등이 스승의 높은 행적을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표문(表文)을 올려 기록해주기를 청하므로, 왕이 서서학사 박인범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유청의 비문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의구심을 가진다. ① 이미 부왕(인종)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최유청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있다가 의종 4년에 이르러서 왕의 독촉을 받고서야 비문을 찬술하게 되었는지, ② 도선의 제자를 언급할 때 역사에 아무 흔적이 없는 홍적을 언급하면서 왜 신라말의 고승 동진 경보(洞眞 慶甫, 869∼947)는 언급되고 있지 않는지, ③ 왕이 서서학사 박인범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하게 되는 사유를 왜 우리는 나말여초의 어떤 역사서나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지, ④ 도선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죽고 나서 252년이 지나서야 최유청의 비문을 통하여 왜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지, 주지하다시피 동리산문의 개조 적인 혜철은 입적 후 11년 만인 872년에 비문이 찬술되고, 태안사(泰安寺) 계열 광자 윤다(廣慈 允多, 864∼945)는 입적 후 6년째인 951년 비문이 찬술되며, 옥룡사 계열로서 도선의 사법제자라는 동진 경보는 입적 후 11년째인 958년에 비문이 찬술된다. 그런데 도선만 유독 입적(898)후 252년이 지난 1150년에 비문이 찬술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⑤ 《삼국유사》, 《삼국사기》 그리고 나말 선승들의 비문(특별히 도선의 사법제자라고 회자되는 동진 경보의 비문5)에 도선에 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6) 오직 최유청의 비문에만 도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7)

주)----------
1) 혜철은 861년 입적하였고 그의 비문은 신라 경문왕(景文王) 12년(872) 입당사은겸숙위판관한림랑(入唐謝恩兼宿衛判官翰林郞) 최하(崔賀)에 의해서 찬술(撰述)되었다. 비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화엄사에 소장된 사본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수록되어 있다. 혜철이 입적한지 11년만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론 약간의 과장은 있겠지만, 이 비문은 혜철의 일생과 선사상에 가장 근접하는 자료라 여겨진다. 비문은 이지관(李智冠)이 교감역주(校勘譯註)하여 그 결과물을 출간하였다. 이지관 교감역주,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谷城 大安寺 寂忍禪師 照輪淸淨塔碑文)>, 《교감역주 역대 고승 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 <신라편>, 가산문고(伽山文庫), 1994.
2) 도선에 관한 자료는 아래에서 보듯이 많다. 그러나 제시된 자료 ①~⑩까지는 그 신뢰도에 있어서 모두 문제가 있다. 이 중에서 학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자료 ③, 즉 최유청(崔惟淸)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최유청의 비명에 대하여서도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선학인 정성본(鄭性本)이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정성본,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연구>, 《도선국사와 한국》,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96〕. 필자는 정성본의 견해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따라서, 앞으로 논지의 전개과정에서 차차 드러나겠지만, 동리산문에서 도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필자의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적인 논구는 정성본의 견해에 힘입은 바가 많다. 논의는 최유청의 비문에 의거해서 하겠으며, 비문의 인용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지관의 역주에 근거한다.〔이지관 교감역주,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光陽 玉龍寺 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고려편(高麗篇) 3>(가산문고, 1996)).
<도선 관계 자료>
① 고려 태조 26년(943) 태조가 자손에게 내린 <훈요심조(訓要十條)>.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태조 26년’ 조).
② 고려 인종(1123∼1246) 때 왕명에 의거 최응청(崔應淸)이 찬술한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급관고(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及官誥)>(《동문선(東文選)》 제27권).
③ 고려 의종 4년 최유청이 왕명에 의거 찬술한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병서(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並序)>(《동문선》 제117권,《조선금석총람》 권상).
④ 고려 의종(1147∼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편집한 《편년통록(編年通錄)》(《고려사》 ‘고려세조(高麗世祖)’ 조).
⑤ 고려 충숙왕(1314∼1339)때 민지(閔漬)가 찬술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고려사》 ‘고려세조’ 조).
⑥ 조선 세종 27년(1445)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⑦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영암군(全羅道 靈巖郡)’ 조.
⑧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전라도 영암군(全羅道 靈巖郡)’ 조 등.
⑨ 조선총독부 편집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의 <선각국사실록(先覺國師實錄)> 등.
⑩ 《지리산화엄사사적(智異山華嚴寺史蹟)》.
3) 이지관 교감역주,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3>(가산문고, 1996), pp.431∼432.
4) 위의 책, p.436.
5) 이 문제는 경보를 논구할 때 상설하게 될 것이다.
6) 최병헌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 도선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도선의 실재성을 의심할 결정적인 자료가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선 뿐 아니라 동시대의 다른 선사들도 역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선각국사 도선의 신연구》, 영암군, 1988. p.96.
7) 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구는 다음을 참고. 정성본, <선각국사 도선 연구>, pp.127∼129.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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