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도 개성이 있다

어쩌다가 개를 세 마리나 키우게 된 적이 있다. 발바리를 닮은 잡견을 주신 분이 풍산개 암수 두 마리까지 주시는 바람에 팔자에 없는 세 마리 개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름 같이 지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름을 발바리 — 잡견이라고 하면 싫어할 테니까 발바리라고 해두자 — 는 ‘락’, 풍산개 수컷은 ‘산’, 암컷은 ‘맥’이라고 지었다. 락은 이름 그대로 저 즐겁게 제멋대로 사는 천방지축이었고, 맥은 순수혈통의 풍산개 아가씨답게 새초롬하고 이기적이었다. 수컷 산이 어지간히 구애해도 몸을 허락하는 일이 없었다. 주인에게 가장 헌신적인 녀석은 산이었다. 뒷산을 산책할 때면 언제나 내 곁을 따르며, 맥 따라 잠깐 나를 떠나는 경우도 부르면 재깍 달려오는 듬직한 녀석이었다. 인연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해서 많이 아쉽지만 지금도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가끔 뉴스 시간에 개 사육장의 열악한 환경이 보도되곤 한다. 개들은 불쌍하고 주인은 감정 없는 악덕 도살자로 비쳐진다. 그런 농장의 개들에겐 아마도 이름이 없을 것이다.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기엔 주인 또한 먹고 살기가 녹녹치 않아 보인다.

옛날 중국의 동진(東晉) 시대에 축계옹(祝雞翁)이란 사람이 시향(尸鄕)의 북쪽 산 아래에 살고 있었다. 그는 천여 마리의 닭을 길렀는데, 닭마다 모두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옹이 그 이름을 부르면 모두 알아듣고 달려 나왔다고 하는데……. 갈홍(葛洪)의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개 세 마리를 키워보니 개라고 해서 다 똑같은 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각각 개성이 있고, 그에 따라 호오가 엇갈리기도 한다. 유난히 애정이 더 가는 놈도 있고, 괜히 얄미운 놈도 있다. 개든, 닭이든, 혹은 돼지든, 모두 자기들만의 개성이 있다.

개성과 이름 차원에서 본다면 개 사육장 주인이나, 대규모 닭 공장의 회장님이나 크게 다를 건 없다. 환경이 더 더러운지 아니면 더 깨끗한지 하는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싸잡아 무게 몇 kg으로 팔려나가는 점은 똑같기에 하는 말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인류보다 훨씬 더 높은 지능을 갖고, 지구보다 몇 배 더 발달된 문명을 이룬, 먼 행성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했다. 고기에서 얻을 수 있는 단백질이 긴급히 필요한 상황이어서 지구가 타깃이 된 것이다. 그런 외계인들에겐 인간이나 원숭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도 풍부함의 정도가 아닐까. 지구에는 인간이란 종이 엄청 많이 살고 있고, 영양상태도 매우 양호하니, 몇 십 년은 충분히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을까. 그때는 너나 나나, 그나 그녀나, 줄 서서 포장육이 되어 나오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 개들은 그냥 개일 뿐이다, 플라톤

▲ 라파엘로, 〈아테네학당〉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보면, 한 가운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져 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중앙에 배치되는 서양화의 전통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 두 사람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플라톤의 스승이자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조차 주변으로 물러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왼쪽으로 여덟 번째쯤에 제자들에게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는 대머리 아저씨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수다쟁이 잔소리꾼 같기도 하고, 형형한 눈빛이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을 느낄 것만 같기도 하다. 그 옆에 소크라테스의 열변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듣는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지만, 일단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 중의 영웅 알렉산드로스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드러내기 위한 엑스트라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당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모로 대비가 되고 있다. 나이, 색깔, 표정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사람이 가리키는 손의 방향이다. 플라톤의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손은 땅을 가리킨다. 두 지향점이 이렇게 하늘과 땅으로 달라지며, 그 다른 세계는 플라톤이 왼손에 들고 있는 책 《티마이오스》 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왼손에 들고 있는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한껏 고양되고 있다. 《티마이오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되 생성을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나 생성되는 것’이되 결코 존재(실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를 구분하여야 합니다. 분명히 전자는 합리적인 설명[logos]과 함께 지성[nous]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비이성적인 감각과 함께하는 의견[doxa]이요, 생성·소멸하는 것으로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불변하는 것만이 참된 존재로, 이는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고, 생성소멸하며 변화하는 것은 참으로 실재하지 않는 가짜라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만져보는 이 세계는 모두 가짜다. 모사품이기 때문이다. 《티마이오스》에 의하면 이 세계는 데미우르고스(dēmiurgos)라는 조물주(造物主)가 영원불변하는 것, 즉 이데아를 본(本, paradeigma)으로 삼아 빚어낸 것이다. 개들은 개의 이데아라는 틀 속에 넣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니 이 개와 저 개의 구분이 굳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산도 맥도 그냥 개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냥 사람이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라는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혹시 외계인이 아니었을까.

보편(普遍)과 특수(特殊), 혹은 보편과 개별(個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는 동서고금 모든 철학자들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이런 고민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개별은 그냥 무시하면 된다. 오직 하늘의 진품만 바라보면 된다. 그리고 실로 너무도 긴 시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들에게 이 땅의 삶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였다.

3. 산은 키가 크고 맥은 키가 작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이런 생각을 추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들의 선구자였다. 플라톤으로부터 20여 년이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플라톤의 철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문제의 본질을 더 정확히 짚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데아들이 사물들의 실체이면서 그 사물들과 떨어져 있을 수 있겠는가.(결코 그럴 수 없다.)1)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지상의 사물과 괴리된 천상의 이데아란 허구에 불과하다. 그는 《형이상학》을 통해 이데아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그리고 그 귀결점은 땅 위의 개별자들을 떠나서 실체[實體 ,우시아(ousia)]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시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성질이나 모양, 혹은 크기 등이 귀속되는 것, 즉 주인이다. 문장속의 주어이며 결코 술어가 아니다. “나(누구)는 키가 얼마이고, 성격은 어떻다.”라고 말할 때의 주어. 그 크기나 성질의 주인. 나를 형용하는 온갖 서술의 본바탕. 바로 나의 본질인 것이다. 이 본질은 의연코 내 안에 있는 것이지, 결코 나를 떠나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 풍산개도 마찬가지이다. 산은 수컷이고 키가 크며, 맥은 암컷으로 키가 작다고, 둘 다 하얗지만 자세히 보면 그 흰색도 조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산과 맥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하늘은 그만 보고 땅을 바라보자고 한다. 땅 위에 실재하는 개별자들의 개성을 즐기자고 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알고 싶어 한다.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점이 그 증거이다. 우리는 정말 유용성을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감각이란 플라톤이 그토록 부정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일체의 앎은 다 개인적인 의견[doxa]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던 터이다. 감각적인 앎도 잘못되었고, 그 개인적인 주관성도 진리라고 하기엔 어림도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각을 긍정한다. 인간은 누구나 감각적 경험을 즐기며, 그런 경험을 통해 많은 지식을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밑에서부터 올라와 많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 한 철학자의 산 경험에서 얻은 통찰인지도 모른다.

4. 짧은 순간, 가장 좋은 삶을 누려라

▲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에서도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Stageiros)에서 태어났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북동부 변방으로, 당시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야만인으로 취급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리스의 영향력이 점차 확장되고 자연스럽게 변방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문화에 편입되면서 같은 문자와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으로 인정받은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중국문화의 발상지인 중원(中原)은 황하 중류의 평야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략 하북(河北) 일부와 산서(山西) 일부 지역으로, 춘추시대 위(衛)나라를 중심으로 한 주변을 중원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이곳이 중국문화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산동(山東)의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도 주로 이곳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중원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돌아가자!”고 하며 고국 노나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문명 초기 양자강 일대의 남방은 그야말로 야만족이 사는 곳, 문명국 사람은 살 곳이 못되는 미개지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국문화 속에 소리 없이 편입되며 초(楚), 오(吳), 월(越) 등이 중요한 제후국으로 등장한다. 문화의 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상위의 문화가 넓게 확장되며 주변국들을 자연스럽게 포섭하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관계가 그랬다.

하여튼 변방후진국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궁정의사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문화선진국 아테네로 유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최고 명문, 플라톤이 세운 대학, 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죽기까지 20여 년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그들의 사제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였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를 나왔다. 그는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 레스보스 등지에 머물며 학문을 연구하고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세우고 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그의 명성 또한 높아져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의 나이 15살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교육은 대략 3년간 지속된다. 알렉산드로스가 18살 장부가 되어 실제 정치에 참여하고, 이후 동방원정에 나서면서 사제의 연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를 따라 원정에 나선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학원인 리케이온(Lykeion)을 세운다. 이제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라는 신분은 그의 명성을 더욱 찬란하게 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또한 그에게도 커다란 위험이 되었을 수도 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난다. 아테네를 떠나며 “아테네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에서 두 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전철을 미리 피한다는 말인데, 아마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리케이온을 놔두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꽤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하여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의 고향인 에우보이아(Euboia)의 칼키스(Chalkis)로 가서 이듬해(기원전 322년)에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야만인 취급받던 문화후진국 의사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당시에 의사란 신분은 매우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고대의 의사는 이발사에다 마사지사까지 겸하여야 하는 직업이었다. 조선시대에 의원이 그나마 중인(中人)의 신분이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열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다행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가 궁정의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런 만큼이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아테네로 유학을 보낼 만큼 그의 아버지는 상당히 깬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의사의 아들은 무조건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야만 했던 시절에 자신의 업을 잇기 보다는 유학을 보내어 선진문물을 익히도록 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버지의 일을 배우며 성장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추측 가능하다. 많은 환자들을 대하며,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질병 또한 나름의 원인이 있다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이런 경험은 그의 철학, 특히 생물학과 자연학에 상당히 투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수업을 바탕으로, 지중해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그의 자연학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가 동식물의 특징을 찾아내고 다시 유(類)와 종(種)으로 분류한 것은 근대과학이 만개한 이후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철학을 종합한 철학자이다. 그는 관념론에 유물론의 옷을 입혔고, 자연학에 형이상학을 더하였다. 천상과 지상을 합하여 윤리학을 완성하였고, 이로부터 정치학으로 나아갔다. 더하여 시학과 예술론까지……. 과히 그가 손대지 않은 영역이 없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런 종합을 통해 그는 온전히 땅위를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 그 개별자들의 존재 근거를 확립하였다. 개성을 박탈하고, 감정을 고갈시킨 저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만물을 해방시켜준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한 가지 원리에 우주와 자연계가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런 원리의 삶은 우리가 짧은 순간 누리는 가장 좋은 삶과 같은 것이다.2)

여기에서 말하는 원리는 형이상학적 원리, 곧 자연계의 변화법칙이며 우주궁극의 원리이다. 그 원리가 저 먼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짧은 삶을 살아가는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껏 누리며 살아야 하는 삶이다.

주) ----------
1) 플라톤, 《형이상학》.
2) 위의 책.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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