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에서는 흔히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여 ‘일체 중생들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불성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열반경》에서는 그 이유를 일곱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들에게 다 불성이 있는 것이 금강역사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확실하건만 어찌하여 모든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육근(六根)에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냄새 맡아지고, 맛보아지고, 감촉으로 느껴지고, 의식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성은 이와 같은 육근으로는 파악되지 않으니 어째서 알 수 없는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선남자여, 마치 우리가 눈이 멀었다면 색법이 비록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것이 다르고 길고 짧은 모양이 있지만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해서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길고 짧은 모양의 물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눈이 멀었다면 보지 못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눈이 먼 사람의 비유’라고 한다. 중생들은 존재 여부를 육근으로 판단하는데 육근에서 알지 못하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불성이 있느냐의 여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경에서는 중생들은 육근이 청정하지 못하여 불성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십주(十住)보살은 불성을 보는 것이 밤에 빛깔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는 낮에 빛깔을 보는 것처럼 명확하다고 한다. 우리들 중생심에서는 항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때마다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고 바르지 못한 견해로 판단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알지 못하므로 갖가지 몸으로 업을 짓고 입으로 업을 짓고 뜻으로 업을 지어서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대로 닦아서 이러한 중생심이 가라 앉으면 십주보살같이 불성이 있음을 알고 부처님처럼 명확히 불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용한 의원의 비유’이다. 눈에 장애 있는 사람은 분명하게 물체를 볼 수 없지만 용한 의원이 눈병을 치료하면 약의 효력으로 분명하게 보게 된다. 십주보살도 이와 같아서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하지만, 수행하여 수능엄삼매의 힘을 얻으면 분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범부들은 온갖 법은 생사라 하고, 온갖 법이 아닌 것은 삼보라고 한다. 이때 성문 연각들은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고이고 청정하지 않다고 보고, 일체법 아닌 것도 무상하고 무아이고 고이고 청정하지 않다고 보므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십주보살은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고이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일체법 아닌 것은 부분적으로 영원하고 내가 있고 안락하고 청정함을 보게 된다. 여래는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고이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일체법이 아닌 것은 영원하고 내가 있고 안락하고 청정함을 본다. 이런 까닭에 여래는 불성 보기를 손바닥에 있는 아마륵과 과실 보듯이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초하루 달의 비유’다. 초하루에 달을 보면 달이 보이지 않으나, 보름이 되면 나타나듯이 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십력과 사무소외와 대비심과 삼념처를 얻으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중생들은 탐·진·치의 삼독을 깨트리고 일천제는 일천제를 깨트린 뒤에, 십력·사무소외·대비·삼념처를 얻으면 불성이 있다고 한다.

네 번째는 ‘평등하게 모두 가지고 있다는 비유’이다. 우리 인생의 생로병사 모습을 십이인연이라 할 수 있으니, 중생들은 안팎으로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 과거의 번뇌를 무명(無明)이라 하고, 과거의 업을 행(行)이라 하며, 현재 세상의 태에 드는 것을 식(識)이라 하고, 태에 들어가 오분(五分)·사근(四根)을 구족하지 못한 것을 명색(名色)이라 하고, 사근을 구족하였으나 촉이라 할 수 없는 때를 육입(六入)이라 하고, 괴롭고 즐거움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觸)이라 하고, 애욕에 물드는 것을 수(受)라 하고, 오욕에 익히어 가까이 함을 애(愛)라 하며, 안과 밖으로 달리어 구함을 취(取)라 하며, 안과 밖의 일을 위하여 몸과 입과 뜻으로 업을 일으킴을 유(有)라 하고, 현재 세상의 식을 미래의 생(生)이라 하고, 현재의 명색·육입·촉·수를 미래 세상의 늙고 병들고 죽는 것[老病死]이라 한다. 만약 욕계 중생이 가라라(歌羅邏, kalalaṃ) 때 죽으면 십이인연이 없고, 생으로부터 노사에 이르면 십이인연을 구족하게 된다. 색계 중생들은 수와 촉과 애와 늙고 병드는 일이 없지만 십이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하며, 무색게 중생들은 색도 없고 내지 노사도 없지만 십이인연을 구족하였다고 이름하니, 이들 삼계에서는 모두 반드시 얻게 되기 때문에 십이인연을 구족하였다고 한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므로 다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설산의 비유’이다. 설산에 인욕이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가 나오고, 또 이름모를 이상한 풀이 있는데 이를 소가 먹으면 제호가 없어진다. 비록 제호가 없어지더라도 인욕초가 없다고 말 할 수 없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설산은 여래를 말하고, 인욕초는 대열반을 말하며, 이상한 풀은 십이부경을 가리킨다고 한다. 중생이 대열반을 듣고 물어서 불성을 보게 되지만, 십이부경 가운데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더라도 불성이 없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섯째 비유는 검은 쇠의 비유이다. 검은 쇠가 불에 들어가 달궈지면 붉은 색이 되고 식으면 도로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과 같아서, 이 검은 빛은 쇠의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고 인연에 의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의 안과 밖에 없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번뇌의 불이 꺼지면 나타나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종자의 비유’이다. 종자가 썩어서 없어지면 싹이 생기지 않는데, 싹은 종자의 안과 밖에서 찾을 수 없지만 땅에 심으면 싹이 나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불성도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으나, 열반의 미묘경전과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면 불성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Ikis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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