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남수·임병화 ‘청담 순호 선사 평전’

우리나라 어느 한 곳, 어느 한 사람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경술국치 후 35년간 이어진 일제 강점기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시기였다. 일제는 사찰령을 통해 한국불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했고, 상당수 승려들 또한 대처육식의 일본불교에 물들어갔다. 광복 이후 일제는 물러갔지만 한국불교가 정체성을 회복하기란 요원했다. 일본불교가 남긴 상처는 깊었고, 기득권층의 저항은 거셌다.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과 조계종 종정, 총무원장을 지낸 청담 순호(靑潭 淳浩, 1902~1971) 스님은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거대한 버팀목이었다.

청담 스님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청담박사 1, 2호’ 방남수 청담고등학교 교장과 임병화 전 불교신문 편집국장이 함께 한국불교의 거목 청담 순호 스님의 평전을 냈다. 무려 8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두 사람은 청담 스님의 출생부터 수행, 불교계를 정화하고 조계종을 일으켜 세우기까지의 과정, 포교와 교육 활동에 헌신한 삶의 면면과 사상까지 스님의 모든 것을 생존 당시의 기록, 후학과 함께 활동한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빠짐없이 담아냈다. 특히 워낙 걸출한 행동가였던 탓에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청담 스님의 사상가적 측면을 심도 있게 다룬 점도 눈에 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이 다수 수록돼 있다.

지금껏 청담 스님은 박포명(朴抱明) 스님을 만나 발심 출가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채서응(蔡瑞應) 스님을 만나 발심하고 남경봉(南鏡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는 것이다.

스님이 건당해 박한영(朴漢永) 스님을 은법사로 모신 인연도 눈길을 끈다. 스님은 정화를 시작하면서 남경봉 스님과 이연(移緣)했다고 한다. “대처승을 정화하자고 앞장서는데 은사가 대처승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스님이 정화 이후 ‘순호’라는 법명을 버리고 ‘청담’이라는 법호를 사용한 것도 대처승 은사로부터 받은 법명이었기 때문이다.

청담 스님은 종교 화합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1965년 스님의 원력으로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 등 6대 종교가 ‘한국종교연구협회’를 결성했는데, 스님은 호국참회원 건립을 추진하면서도 늘 “종교회관을 짓는 것이 더 급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의 입적에 얽힌 의문도 해소했다. 스님이 갑작스럽게 입적하자 정화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테러를 했다거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으나 사실이 아니며, 고령의 나이에도 하루 평균 8~9회씩이나 되는 설법과 종무행정을 소화하다 보니 과로로 뇌졸중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청담 스님은 입적 전에도 두 번이나 뇌졸중으로 쓰려졌다고 한다.

평전은 1장 생애와 수행, 2장 대사회적 활동, 3장 정화불사, 4장 마음사상, 5장 마음사상의 원류, 6장 선사상, 7장 저서에 나타난 불교관으로 구성됐으며, 부록으로 주요 저서와 법어록·강의서, 청담 법계, 청담 스님 관련 자료를 수록했다.

공저자인 임병화 전 불교신문 편집국장은 “청담 스님에 관해 가능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며, “제자들이 보기에는 좀 서운한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화남출판사 | 3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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