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서악동 고분군. <사진=경주시관광자원영상이미지>

눌지왕(訥祗王) 3년인 419년 기미(己未)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보낸 사신이 왔다. “우리 임금님께서 대왕의 아우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를 갖추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가깝게 지내기를 원하여 특별히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로 인해 화친을 맺기로 하고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이때 내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하여 고구려에 보냈다. 장수왕도 또한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좀 찌질했던 사람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내물마립간 이야기도 다 건너뛰고 바로 눌지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눌지왕은 417년부터 458년까지 재위한 제19대 왕이다. 눌지왕은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 냉수리 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미추왕의 손자이며 실성왕의 사위라는 뜻이다. 앞서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401년에 귀국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기분이 좋을리 없었던 실성왕은 내물왕의 아들 눌지를 해침으로써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그런데 거꾸로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에 의해 살해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략난감하지만, 결국 고구려 세력을 등에 입은 실성왕이 ‘아재개그’로 좀 실성을 한 것인가보다. 대충 이런 스토리는 약간 안목을 넓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라만 볼 것이 아니라 고구려도 시야에 넣고 봐야 한다. 실성왕을 지원한 고구려 세력보다, 다급해진 눌지왕이 요청한 구원을 받아들여준 고구려의 다른 세력이 보다 강력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쉽겠다. 결국 이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서 이득을 보는 것은 고구려일 따름이다. 당시의 신라는 이렇게 고구려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여하튼 눌지왕 역시 즉위 후 동생 복호를 고구려에 보내야 했다. 하지만 동생의 구출에 있어서 아버지 내물왕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형제애’로 미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다. 또 실성이사금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未斯欣)도 귀국시켰다.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433년에는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45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눌지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에 입각해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사흔을 귀국시킨 뒤, 왜가 431·440·44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자 이를 모두 막아내었다. 신라가 명실상부한 독립국가로서 당당하게 외교를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눌지왕 때부터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이 눌지왕이 장수왕 사신이 와서 동생을 달라고 하는데, 불행이 아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실성을 죽이고 등극하여 ‘명분’이 없다며 ‘왕위’를 찬탈한 것을 꾸짖기라도 할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을까? 여하튼 눌지왕은 고구려의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동생을 달라고 하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선뜻 받아들였다. 즉위한지 얼마 안 된 눌지왕은 그렇게 허약하기만 했다.

여하튼 아버지 내물왕이 그랬듯 눌지왕도 동생을 너무 쉽게 볼모로 고구려에 보낸다. 하지만 고달픈 인질살이를 좋아할 왕자가 어디 있을까? 동생인 보해가 형인 눌지왕이 좋게 말을 했는데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나 보다. 눌지왕은 결국 ‘왕명’으로 보해를 고구려에 보낸다. 울고 불고 원망하고 별짓을 다했는지 아니면 또 고구려에 가서 보해 역시 ‘실성왕’이 그랬듯이 자신의 힘을 키웠나보다. 눌지왕은 얼마안가 보해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리고 온다. 물론 그만큼 눌지왕은 ‘절치부심’하며 국력을 키우는데 무척 노력했을 것이다. 마립간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아버지인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강대한 국가로 성장시킨 장수왕과 맞장을 뜰 정도로 눌지왕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신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보해가 한 명이 아니었나? 《삼국사기》는 실성이사금 11년(412)의 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아무래도 중간에 잘못 보냈다고 하면서 새로 다른 이복동생이라도 보냈나? 아니면 골품이 없는 귀족 자제 한 명을 대신 보낸 것인지 모르겠다. 혹시 나중에 복해 다음으로 김무알을 보낸 것인가? 여하튼 실성왕 때 또는 눌지왕 때에 왕자와 귀족 몇 명을 보낸 것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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