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거듭해 온 인류 역사
 대안 찾는 화쟁윤리 위해
 시대착오적 독재 걷어내야


평화는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주로 지칭하는 소극적 평화와 마음의 평화는 물론 온전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조건까지를 포함하는 적극적 평화로 나뉜다. 적극적 평화에는 현재 우리 한반도와 같이 언제든지 전쟁이 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겉으로는 전쟁이 없
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성조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쉽게, 모든 면에서 선진국이라고 말해버리곤 하는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해서 사정이 그다지 나아보이지 않는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나 프랑스 니스와 독일 뮌헨에서 일어난 테러가 언제든 다시 그들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를 떨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달 여정으로 다녀온 프랑스와 독일이 꼭 그런 모습을 하고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거리에 포진한 중무장한 경찰과 이슬람 사람을 포함한 외국인에게 보내는 적대적인 시선, 그러면서도 지칠 대로 지친 얼굴 표정 등이 그런 판단의 근거들이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20세기만큼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 세계대전이 있었던 때는 드물다. 그 상처의 공유 때문인지 21세기에는 아직 세계적인 차원의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곳곳에서 분쟁과 내전이 발생하고 있고 그것이 언제든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사드(THAAD) 배치를 둘러싼 한반도 상황이 전형적인 사례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사드는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물론 중국과 일본까지 자극함으로써 끝없는 군비 경쟁으로 치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세계적인 차원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높아지고 있다.

어떤 사태를 바라보는 데는 늘 몇 가지 관점이 충돌하기 마련이다. 북한이 저렇게 힘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힘에 맞서기 위해 배치하는 사드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관점이 있고, 사드가 뿜어내는 전자파는 물론 사드 배치로 인해 결국 인류 살상무기를 확대하는 길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관점도 있다. 모두 가능한 관점이고 각각의 일리(一理)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관점들은 각각의 한계 또한 지니고 있어서 반드시 서로를 소통시키면서 보다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화쟁(和諍)의 과정과 윤리가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선거 때만 관심을 갖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참여(參與)와 숙의(熟議)민주주의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서 온전한 평화는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에 기반한 끝없는 탐욕과 성냄이 끝없는 갈등과 충돌로 이어지고, 그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전개되면 전쟁이 된다. 21세기 시민사회에서 국가는 시민이 주인이 되어 만들고 이끌어가는 것이고 그런 점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국가 사이의 전쟁 또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행히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민들 사이의 의견 교환의 장이 그 속도와 범위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화쟁의 윤리 속에서 우리들 내부의 의견 교환과 충돌은 그 자체로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과정이다. 다만 서로의 관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리(一理), 즉 진리의 한 부분을 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고, 정부는 헌법을 기반으로 삼아 이런 과정이 보다 원활하게 전개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면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조선 시대의 신민문화(臣民文化)가 잔존하고 있어 그 소통 과정을 적대시하는 시대착오적인 인식이 통용되기도 한다. 대통령과 그 주변사람들은 물론 혹시 내 마음 속에 그런 편의적이고 독재적인 생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일이 모든 문제를 해소해가는 첫걸음이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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