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삼매의 힘으로 금강의 바른 정(定)에 편안히 머물고 계신다니, 도체(道體)가 평안하고 만복하심을 축하합니다. 이 중은 도에는 진전이 없고 사람은 제도하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평안하나 무슨 말을 하리오.

드릴 말씀은 지난번에 보내주신 <염기가(拈己歌)>와 두 연구(聯句)를 쓴 것은 이 글씨 이 노래를 평범한 세상 사람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너무도 좋아서 완상(玩賞)하느라 글씨의 먹이 변하고 종이가 해질 지경입니다. 진 상서(陳尙書)와 방거사(龐居士)가 이 세상에 다시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대저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실지(實地)를 밟지 못하고 문자나 알음알이로만 불법을 알다가 죄다 업풍(業風)의 힘에 휘둘려 마침내 실패하고 마니, 자신을 스스로 잘 점검하여 공부를 정밀하게 해야 합니다.

서로 사는 곳이 다소 멀어 만나서 회포를 풀지는 못하지만 심월(心月)은 거리에 구애되지 않으니, 그저 이 심월의 삼매로 서로 만납시다.

마침 인편이 있기에 몇 자로 안부를 묻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대필(代筆)하게 하는 터라 서신의 예(禮)를 갖추지 못합니다. 합장하고 올립니다.

以般若三昧力安住金剛正定, 爲賀道軆寧福. 鯫禿於道未進, 於人未度, 雖安何道? 就控1)向惠拈己歌與二聯寫, 此筆此咏, 豈常世人所能哉! 淸賞愛翫, 不覺墨渝紙弊. 陳尙書・龐居士, 不意復有於斯世也. 古人云: “硏窮至理, 以悟爲則.” 大抵學佛者脚不踏實地, 文字知解, 盡是風力所轉, 終成敗壞, 自家點檢理會, 不得鹵莾. 相去稍遠, 未能面穩, 心月無間, 只得以此三昧相團. 適有信便, 以數字相候, 餘客腕代草, 不備. 和南.

해설

지난번에 이어 경허가 영남 예천에 살던 선비 장 상사(張上舍)와 김석두(金石頭)에게 보낸 또 한 통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경허와 영남 선비 얘기를 더 할까 한다.

장 상사는 진사(進士)인 정련거사(淨蓮居士) 장효영(張孝永)이고 김석두는 석두거사(石頭居士) 김병선(金炳先)이다. 이들의 호만 보아도 불교 수행에 관심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경허가 보낸 앞 편지에 대한 답서인 것으로 보아 역시 1900년경 경허가 남원 실상사에 주석할 무렵 쓴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염기가(拈己歌)>는 무엇일까?

한암(漢巖) 중원(重遠)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로부터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형상이 형상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문득 개오(開悟)한다. 한암은 《일생패궐(一生敗闕)》에서 그 때의 심경을 “안광이 문득 열려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으니, 모든 사물을 잡아보매 낱낱이 나 아님이 없었다[眼光忽開, 盖盡三千界. 拈來物物, 無非自己].”라고 술회하였다. <염기가(拈己歌)>는 바로 ‘모든 사물을 잡아보매 낱낱이 나 아님이 없었다[拈來物物, 無非自己].’는 뜻을 노래한 시일 것이다. 이는 “사물마다 잡아 보매 걸림이 없는[物物拈來無罣礙]” 경지로, 마음이라 할 것이 따로 없어 모든 것이 마음 아님이 없는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무심(無心)이요 무아(無我)라 마음이 없고 내가 없다면, 모든 것이 마음이요 나 아님이 없게 되니, 즉 심외무물(心外無物)이요 물외무심(物外無心)이다. <염기가>는 바로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시로, 경허가 앞서 보낸 편지에서 “대저 일점 신령한 마음은 그 자체가 걸림 없이 툭 트이고 아주 말쑥하여 본래 갖추어진 바탕에 터럭만한 것도 아무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도달할 본래 자리에 도달하면 자기의 밖이니 자기니 하며 지리(支離)하고 모호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이 경지에 이르면 자유롭다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말일 뿐입니다[夫一點靈臺, 廓然淨盡, 絶廉纖, 勿痕縫於本有田地. 到其所到, 不用支離塗糊於己之外與己矣. 其自由二字, 亦閒言語].”라고 한 데 답한 것일 터다.

방거사(龐居士)는 당(唐)나라 때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은 방온(龐蘊)이고, 진 상서(陳尙書)는 당(當)나라 때 목주(睦州) 진존숙(陳尊宿)의 법손(法孫)으로 목주자사(睦州刺史)를 역임하고 벼슬이 상서(尙書)에 이른 진조(陳操)이니, 중국 선가(禪家)에서 안목이 고준한 대표적인 거사들이다.

경허가 <염기가>와 연구 글씨를 칭찬하고 장효영과 김병선 두 사람을 방거사와 진 상서에 비긴 것은 예투로 하는 인사이다. 경허는 불법은 자신이 실제로 깨달아야 하지 문자나 알음알이로 불법을 알아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충고하였다.

충청도 도비산 부석사에 살던 경허는 1898년 53세 때 영남으로 내려와 범어사에 선원을 열고 그 이듬해에는 해인사에 조실로 주석한다. 이후로 영남 일대에 많은 선원을 열고 선풍을 떨치다가 1904년 59세 때 해인사 조실로 인경불사(印經佛事)를 마무리하고 종적을 감춘다. 장효영과 김병선은 아마 1900년 이전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된다.

1981년에 간행된 《경허법어》에는 경허가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 유명한 묵군자(默君子)를 찾아가 만난 얘기가 실려 있다.

경허가 묵군자가 앉아 있는 방 안에 들어가자 묵군자는 경허를 보고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있다가 경허가 먼저 “묵군자, 묵군자, 내 그대의 성화를 들은 지가 오래더니,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로군.” 하자 묵군자가 “녜, 경허대사, 경허대사! 성망을 들은 지 오래인데 바로 경허대사가 아니시오.”라 하고 서로 뜻이 통하였다. 묵군자는 바로 주안상을 차려오라고 분부하였고, 여러 날 동안 경허를 모시고 법담(法談)을 나누었다.

묵군자는 누구일까. 당시에 경상도 지방에서 이름이 알려졌다는데 묵군자라는 인물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경허가 해인사에 주석할 무렵 경상남도 고성 동해면 장기리에는 묵희(墨熙 1878~?)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호는 경산(敬山) 또는 구절산인(九節山人)인데, 축지법을 하고 도술을 부리는 묵근자(墨根子)로 더 알려진 이인(異人)이었다. 그는 서당 훈장을 하면서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묵근자의 글씨는 일본에까지도 전해져 소장되고 있으며, 동해면 장기리 군진고개에 있는 ‘창녕 조씨 열녀비문’과 1937년 4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 제자(題字)로 쓴 ‘光風霽月(광풍제월)’이 그의 글씨이다. 독립투사로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침묵하는 군자란 뜻인 묵군자는 선비가 자호(自號)로 쓰기는 어렵다. 남이 불러주는 호칭이라 해도 대놓고 군자라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묵근자(墨根子)가 발음이 비슷해 묵군자(默君子)라 와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대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비롯하여 서예가들은 불교를 배척하지 않고 사찰에 글씨를 남기는 등 불교와 친밀한 생활을 한 이들이 많다. 서예가이고 도술을 부리는 이인이라면 경허가 찾아가봄직한 사람이 아닐까. 구전하는 경허의 일화가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한 증거를 찾은 듯하여 흐뭇하다.

조선이 끝날 무렵, 경상북도 예천에 살던 진사 장효영과 선비 김병선, 그리고 경상남도 고성에 살던 묵근자 묵희, 이들과 해인사 조실 경허의 인연은 숭유억불의 얼음장 아래에도 재가불자(在家佛子)의 수행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흐뭇한 미담이다.

주) -----
1) 控 : 선학원본에는 拱 자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므로 고쳤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ks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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