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통일기인 7~8세기, 신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 담론의 주요 주제는 ‘인식〔識〕’과 ‘마음〔心〕’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동아시아 불교학은 당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신라인 원효(元曉, 617~686)와 중국인 법장(法藏, 643~712)의 이해를 거친, 인도인 아슈바고샤(Aśvaghoṣa, 馬鳴, 100~160)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담론 체계에 깊이 의존하게 되며,1) 이것을 통해 화엄(華嚴)과의 접목이 시도된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통일 이후에 활동했던 신라의 대표적인 불교 사상가 대현(大賢, 생몰년 미상)과 견등(見登, 생몰년 미상)의 경우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대현의 휘명(諱名)은 대현(大賢) 또는 태현(太賢)이라 한다. 스스로는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칭하였다. 대현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현(大賢)이라고 하였고, 일본에서는 태현(太賢)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2)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가 유가종(瑜伽宗)의 개산조로서 경주 남산의 용장사(茸長寺)에 거주하였는데, 지혜와 언변이 정민하고 판단이 분명하였으며, 법상종(法相宗)의 이치를 통달하여 후학들과 중국의 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기준으로 했다고 전한다. 대현의 저서는 경(經)에 관한 것으로는 《화엄경고적기(華嚴經古迹記)》 10권 등 20종, 율(律)에 관한 것으로는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3권 등 3종, 논(論)에 관한 것으로는 《불지론고적기(佛地論古迹記)》 1권 등 29종, 합해서 총 52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대현은 우리 불교사에서 원효 다음 가는 대 저작가(著作家)로 회자(膾炙)된다. 그러나 이 저술 중 대부분은 거의 없어지고, 현재 《성유식론고적기(成唯識論古迹記)》, 《기신론내의약탐기(起信論內義略探記)》,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범망경보살계본종요(梵網經菩薩戒本宗要)》, 《약사본원경고적기(藥師本願經古迹記)》 등 5종만이 현존하고 있다.3)

견등은 일명 ‘견등지(見登之)’라고도 한다. 11세에 승통 경산(鏡山)에게 득도하였으며 화엄에 밝았다. 저서로는 《대승기신론동이약집(大乘起信論同異略集)》 2권과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 1권이 현존하고 있으며, 《대승기신론동현장(大乘起信論同玄章)》 2권은 전하지 않는다. 견등은 우리나라 기록에는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견등의 이름이 나오는 가장 빠른 기록은 850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술된 일본문헌 《화엄종소립오교십종대의약초(華嚴宗所立五敎十宗大意略抄)》이다. 4)

대현은 중국의 현장(玄奘, 602~664)-규기(窺基, 632~682) 등의 자은학통(慈恩學統)과 신라의 원측(圓測, 613~696)-도증(道證, 생몰년 미상) 등의 서명학통(西明學統) 및 원효와 법장의 《대승기신론》 이해를 자기 입장에서 새롭게 정리한다.5) 견등 역시 원효와 법장의 《대승기신론》 이해를 적극적으로 원용(援用)하고, 더하여 이를 종합한 대현의 견해까지 참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현과 견등의 사유체계를 살핀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첫째, 유식학과 화엄학이 통일 이후 신라에서 어떻게 만나고 얽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둘째, 통일신라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적 사유체계의 중심이 유식에서 화엄으로 전이되는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라인 원측의 서명학통은 중국에서 활동한 신라인 제자들이었던 도증 등에게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신라로 돌아온 도증에 의해 순수 국내파인 대현에게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현은, 처음에는 화엄가로 출발하여 나중에 유식으로 전환하였지만, 해동(海東) 유식(唯識)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다.6)

대현은 붓다의 중도설(中道說)에 입각하여 구유식(舊唯識)인 무상(無相) 유식과 신유식(新唯識)인 유상(有相) 유식을 어떠한 편견도 없이 공평무사하게 원용하여 자신의 담론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유식은 구역(舊譯)의 맥을 이르면서도 신역(新譯)의 정신을 수용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원측에서 도증·승장까지의 서명학통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세계와 사상은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여, 함부로 사견을 섞지 않는 온건한 학적 태도를 보인다. 그의 중심사상은 유식(唯識)이지만, 저서를 통해서 볼 때, 화엄(華嚴)·열반(涅槃)·반야(般若)·법화(法華)·정토(淨土)·미륵신앙(彌勒信仰)·보살계사상(菩薩戒思想) 등에 두루 통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는 《대승기신론》 사상을 제기하면서도 유식에 무게중심을 두고 중관과 유식을 종합·지양하는 사유체계를 수립한다. 중국의 법장은 원효의 영향을 받아 《대승기신론》 사상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두는 사교판을 수립한다. 대현은 원효와 법장의 주장을 가감 없이 전한다. 그렇지만, 본식(本識)을 다시 진식(眞識),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으로 나누는 등의, 원효와 법장에게서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자신만의 독창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견등은 신라 중·하대의 중심교학이었던 유식과 화엄의 중흥조로 평가된다. 그는 《대승기신론동이약집(大乘起信論同異略集)》에서 원효와 법장의 학설을 소개하면서 그 동이점(同異點)을 간략히 요약하여 집성했다. 그 역시 대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견등의 사유체계는 《대승기신론》 사상과 화엄 사상을 종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곳곳에서 《대승기신론》의 사유체계가 화엄의 사유체계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다. 특히 원효와 대현으로 이어지는 《대승기신론》 주석들을 인용하면서, ‘중관과 유식의 화회(和會)’라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견등은 원효의 《대승기신론》 우위론과 법장의 ‘화엄논법’을 원용하여 자신의 기신론 사상의 담론을 구축하고 있다. 견등의 이러한 태도는 서로를 다 부정하면서 새로운 무엇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깨뜨려 줌으로써 서로를 모두 살리는 불교 중도사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대승기신론동이약집》을 집성하면서 대현의 기신론 사유체계의 많은 부분을 수용한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끝에 간결하게 부연한다는 점에 그의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견등의 또 다른 저작인 《화엄일승성불묘의》는 동아시아 화엄 사상사를 통틀어 성불(成佛)을 중심 주제로 하여 구성한 첫 저술이다. 그는 세 가지로 나타나는 《화엄경》의 시불(示佛)과 보살(菩薩)들께 신명을 다 바쳐 귀의하면서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생사를 벗어나 정토왕생하며 부처가 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자세히 설명하였다.

견등에 의하면, 《화엄경》의 교설은, 다른 경전에서는 성불(成佛)이 부정되는 일천제(一闡提)까지 포함하는 궁극의 교설이며, 무정물(無情物)조차도 성불하게 하는 교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엄경》의 교설은 궁극적 계위의 대성인도 다 알기 어려우며, 지혜에 통달한 현자도 헤아리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견등 자신 역시 말세의 어리석은 범부로 부처님의 신묘한 취지는 알 수 없지만, 선현들의 문장을 찾아 성불의 뜻을 열겠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다.7)

 주) -----
1) 《대승기신론》은 전통적으로 인도의 마명(馬鳴)이 기원후 2세기에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저자와 성립 시기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나 티베트어 역본 없이 중국 양(梁)나라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와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ṣānanda: 652∼710)가 옮긴 2종의 한역본만 존재한다. 《대승기신론》이 인도에서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서 여러 교리사상을 받아들여 작은 책 속에 대승불교의 진수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중국·한국·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세한 것은 다음 책을 참고.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동양대학 동양학연구소·인민대학 불교와종교학이론연구소 공편, 《동아시아 불교에서 대승기신론관》(여래, 2016).
2)《삼국유사》에 의하면 대현이 맞다. 자세한 것은 다음 문헌을 참고. 일연 찬(撰), ‘현유가해화엄(賢瑜珈海華嚴條)’ 조 , 《삼국유사》 권제5( 《대정장(大正藏)》 49), p.1009c.
3) 대현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것은 다음 책을 참고. 채인환, <대현법사>, 《한국불교인물사상사》(민족사, 1997), pp.67∼76.
4) 견등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것은 다음 책을 참고. 김천학 옮김,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동국대학교출판부, 2016), p.6.
5) 원측의 제자 도증(道證)은, 원측이 입적하기 5년 전인 692년(효소왕 1)에 신라로 귀국하여 원측의 유식학을 신라에 전했고, 이것은 다시 해동(海東)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으로 회자되는 대현에게로 이어진다.
6)《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에서는 대현이 화엄학을 익힌 뒤에 유식학에 입문하였다고 한다.
7) 김천학 옮김,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 p.5.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010811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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