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소녀 마리아>(독일, 2014)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 재고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종교를 믿은 후 삶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는가, 보다 행복해졌는가, 다른 종교를 믿었다면 어떠했을까 등등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운명이라 여겼던 종교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과 각본상을 받은 <거룩한 소녀 마리아>는 가톨릭에 기반을 둔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종교의 폐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소녀의 희생을 통해 종교의 억압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인간을 위해 탄생한 것인데, 종교로 인해 오히려 불행해진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형식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기도 형식에서 가져왔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었던 약 800m의 길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의 지점이 있습니다. 영화는 이 14개의 지점을 소제목으로 해서 14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습니다. 각 챕터는 길게는 15분 짧게는 5분 정도인데, 한 챕터는 롱테이크 촬영기법으로 원 샷 원 시퀀스로 구성돼 있습니다.

<거룩한 소녀 마리아>의 첫 장은 영화 전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 후 받는 의식인 견진성사를 앞두고 주인공 마리아를 비롯한 또래 아이들 대여섯 명을 앉혀놓고 신부님이 아이들에게 교리공부를 하는 장면인데, 신부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예수님의 전사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부는 종교의 세속화를 비판하면서 교황과 바티칸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는 어린 학생들에게 희생을 권유했습니다.

마리아가 믿는 종단은 가톨릭의 한 종단인데, 이슬람근본주의가 세속의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 이슬람교의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이 종단 또한 세속의 삶을 거부하고 오직 율법에 따른 삶을 강조하면서 마리아의 삶을 구속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인 마리아의 엄마는 특히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삶은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구속과 억압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호감을 갖는 것도, 패션에 대한 관심도, 심지어 음악도 자유롭게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통제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학교 도서관에서 크리스찬이라는 남학생을 만났습니다. 남학생은 마리아를 마음에 들어 했고 마리아 또한 은근히 남학생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크리스찬이 자신이 다니는 성당의 성가대에서 함께 노래 부르자고 했을 때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바흐의 찬송가도 부르지만 찬송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가스펠송도 부르는데 마리아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가스펠송도 부정하기 때문에 그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소년과 함께 성가대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엄격한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혼날 것 같아 거짓말을 했습니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 성가대에서 가스펠송을 부른다는 것까지는 말했지만 그 친구가 남학생이라는 사실은 숨겼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스펠송을 부르는 교회에 간다는 것도 잘못된 것 같고, 남학생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무엇보다도 엄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너무나 께름칙해서 성당으로 가서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마리아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신부보다 더했습니다. 마리아를 타락한 창녀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습니다. 엄마의 비난에 마리아는 울음을 터뜨렸고, 식사시간은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엄마는 평소 이들이 믿는 종교의 율법을 거의 지키면서 사는, 매우 종교적인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우울증 환자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굉장히 히스테리하게 행동했고, 불행해 보였습니다. 결코 그녀의 종교가 그녀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돌볼 때도 애정보다는 아이들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느낌이었고, 그녀의 감정은 마리아에게도 전달돼 마리아 또한 불안한 종교인이 돼 갔습니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팝송을 틀어놓고 아이들에게 뛰기를 시켰는데 마리아는 팝송은 사탄의 음악이기 때문에 자신은 체육수업을 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튀는 행동은 아이들에게 거부감과 이질감을 일으켰고, 마리아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 받는 왕따 학생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믿는 종단의 엄격한 율법은 세상의 삶과 마찰을 일으켰고, 마리아는 세상으로부터 점점 고립돼 갔습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나름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폐증으로 말을 못하는 동생에게 기적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가치라고 배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죄 많은 중생을 위해 희생한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신께 바쳐 동생의 입을 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거식증으로 점점 말라가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하게 된 마리아는 치료조차도 거부하고 마침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리아가 죽는 순간 놀랍게도 동생은 입을 열었습니다.

마리아의 죽음 후 엄마는 마리아의 관을 고르면서 마리아는 성모 마리아처럼 순결한 아이고, 기적을 일으킨 성녀라고 자신의 딸을 치켜세웠습니다. 자신이 마리아에게 기대했던 것처럼 마리아는 그렇게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순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딸이 성녀가 된들 돌아오는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딸에게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녀는 딸에게 죽음을 위한 삶을 살도록 강요했고, 그녀의 딸 마리아는 그녀가 원했던 방식으로 살다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녀는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이걸 원한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딸이 행복하게 살아있기를 원했다는 걸. 그래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무덤에 묻힐 때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깨끗한 삶과 희생은 물론 그만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감독은 질문합니다.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현실의 행복을 거부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이 영화는 종교의 색채를 띠지만, 종교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cshch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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