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明代) 차마무역(茶馬貿易)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바로 ‘조공호시(朝貢互市)’이다. 그런데 조공호시의 실체는 조공 형식을 빌어 한(漢)·장(藏) 간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차마무역이라는 것이다. 당시 명은 티베트 각지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종교지도자와 각 부족 수령들에게 봉작(封爵)을 내리는 ‘분봉정책(分封政策)’을 실시하여 그들을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티베트지역에 정책기구를 설치하여 중앙에서 관리〔駐藏大臣〕를 파견하거나 임명해 티베트를 직·간접으로 감시하고 통치하는 정책을 병행하였다.

명조(明朝)의 분봉정책에 의해 작위(爵位)를 받은 티베트 각 부족 수령과 승려들은 해마다 줄을 이어 명 조정에 조공을 가거나, 혹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함으로써 명 왕조에 신하의 예를 표명(表明)하였다. 이때 그들이 바친 조공품 대부분은 말〔馬〕이었고, 명 조정에서 하사한 회사품(回賜品) 대부분은 중국 내지(內地)에서 생산되는 차(茶)였다.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로 받은 불평등한 대가와는 전혀 다르게 조공 대가로 받은 회사품은 조공품의 세 배에 달할 만큼 후했다. 이 때문에 티베트인들의 조공 회수와 조공 인원은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으며, 조공 목적 또한 조공을 구실로 차(茶)를 얻어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납공(納貢)과 상사(賞賜)로 이루어지는 조공호시는 티베트에게는 중요한 경제교류였던 것이다.

명 조정이 조공 오는 티베트 수령과 승려들에게 주는 사차(賜茶)의 규모는 실로 가관(可觀)이었다. 명 헌종(憲宗) 성화(成化) 18년(1482)에 총 412명이 조공(朝貢)을 왔고, 일인당 받은 사차(賜茶)는 50근씩이었다. 티베트의 수령과 승려들이 받아간 사차(賜茶)의 총 수량은 약 2만 600근이었다.1)

명 무종(武宗) 정덕(正德) 13년(1518)에는 조공 온 티베트 승려들에게 내린 사차(賜茶) 총 수량이 무려 8만 9000근에 달했다.2) 이는 성화(成化) 연간 사차(賜茶) 양의 4배로서 조공의 인원과 회수가 얼마나 많이 증가했나를 잘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티베트인들이 바친 공마(貢馬) 대부분은 열등마(劣等馬)로서 전투용으로는 전혀 쓸모없는 화물 운반용에 불과했으니 그들이 조공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즉, 조공(朝貢)은 형식이고 그 실체는 바로 차마무역이었던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오직 차(茶)를 구해 돌아가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더 많은 차를 구하려는 티베트인들의 조공 증가 추세는 명 헌종(憲宗) 초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재정(財政)의 위기를 느낀 명나라는 마침내 조공에 관한 법을 제정한다. 이 법규는 태조 홍무 연간(年間)에 제정되었던, 3년에 한 번만 조공하도록 허락하는 ‘삼년일공(三年一貢)’의 구례(舊例)3)를 구체적으로 심화·발전시킨 것으로, 지역과 신분에 따라 조공의 시기와 회수 그리고 조공사절단의 인원수까지 아주 상세하게 법으로 규정하여 명시하였다.4) 이 법규는 성화(成化) 연간에 수차례에 걸쳐 강조 실시되지만,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상에서 서술한 명대 ‘차발마제도’와 ‘조공제도’를 종합적으로 비교해 보면 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차발마제도가 명 왕조(王朝)의 티베트 통치 의지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켜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조공제도는 반대로 티베트인들이 중국에서 대량의 차(茶)를 구해가려는 목적을 실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명나라는 겉으로는 차발마제도를 통해서 티베트를 명나라의 직·간접의 통치하에 두었고 안으로는 조공호시를 통해 그들을 회유하는 양면성의 정책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5) 청대 한·장 차마무역의 쇠락

명대에 극도로 발전했던 한·장 차마무역도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 원인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청나라는 명나라와 달리 십전십미(十全十美)의 무공(武功)을 자랑하는 왕조였기 때문에 원(元)나라처럼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복속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회유와 통치 수단이었던 차마무역은 그들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둘째, 역대 왕조가 티베트와 차마무역을 이어서 발전시켜간 주된 목적은 중국 내지(內地)에서 결핍된 군마(軍馬)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미 만주(滿洲)에 우수한 전마(戰馬)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티베트의 말이 필요할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한·장 차마무역도 급속히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청대에 차마교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청대가 비록 한·장 차마무역 쇠락기에 속하긴 하나, 청 한 시대를 두고 봤을 때, 한때 한·장 차마무역이 흥성했던 적이 있었다. 중원(中原)에 막 입성한 청 초기에는 명대와 마찬가지로 ‘차정(茶政)’과 ‘마정(馬政)’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청나라가 자금성(紫禁城 : 北京)에 입성한 순치(順治) 원년(1644)은 빈번한 내외전란과 천하를 통일시키려는 전쟁이 격렬히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명 잔여 세력의 반청봉기(反淸蜂起) 또한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대혼란시기였다. 건국 초기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란의 연속으로 청은 많은 전마(戰馬)를 생산·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대(前代) 어느 왕조보다도 군마(軍馬) 수요가 시급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은 한·장 차마무역이 청대 초기에 다시 한 번 흥성하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체적으로 차마무역 쇠락기에 놓인 청대(淸代)에, 차나무(茶樹)의 종식(種植)은 오히려 명대보다 더욱 보편화되고 확장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때 차 생산량 증가와 품질 고급화는 명대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었으며, 제도방면에 있어서도 명대의 ‘차정(茶政)’이나 ‘차과(茶課)’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렇게 한·장 차마무역은 청 초기 순치(順治) 연간에 다시 한 번 급속도로 회복되는데, 강희(康熙) 초년에 이르러 중국의 대혼란이 끝나고, 강희(康熙) 57년(1718)에 티베트가 청 영토로 정식 귀속됨에 따라 1,000여 년을 이어온 한·장 차마무역은 마침내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강희제 이후에도 한·장 차마무역은 부흥과 쇠락의 반복하며 시흥시파(時興時罷)의 국면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건륭(乾隆) 연간에 이르러서는 역사의 장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주) -----
1) 《明憲宗實錄》卷223, ‘成化 18年 正月 丙子’ 條.
2) 《明武宗實錄》卷162, ‘正德 13年 5月 乙丑’ 條.
3) 《明憲宗實錄》卷21, ‘成化 元年 9月 戊辰’ 條.
4) 《明憲宗實錄》卷78, ‘成化 6年 4月 乙丑’ 條.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p-chon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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