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법문을 사자후라고 한다. 《열반경》에 <사자후보살품>이 있는데, 이 품에는 사자후보살이 부처님의 사자후 법문을 질문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사자후 법문을 닦게 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자후법문이란 첫째 중생에게 마군을 파하고 부처의 십력(十力)을 보이는 법문을 하며, 둘째 부처님의 행하는 법을 나타내어 보여서 사견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바를 지으며, 셋째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에게 여기서 벗어나 무명의 졸음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며, 넷째 나쁜 짓을 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며, 다섯째 사견을 가진 중생을 깨우치게 하는 법문이다.

사자후보살이 굳이 이 법문에 대해서 질문하여 그 뜻을 밝히는 것은 진실한 부처님 법문을 명확히 하여 불교 이외의 가르침, 곧 육사외도 같은 법문이 결코 사자후법문이 될 수 없음을 밝히려는 까닭이라고 한다. 또한 부란나(富蘭那, 외도를 가리킴)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트리려는 까닭이고, 이승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오주 보살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이 사견을 가진 사부대중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없게 하려는 까닭이라고 한다.

사자후법문은 중생들이 거룩한 행, 청정한 행, 하늘의 행을 닦아서 교만한 중생들이 교만을 깨트리게 하고, 선한 법을 내게 하고, 사무애를 내게 하고, 지계바라밀에 구족하게 머물게 하려는 까닭에 사자후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사자후보살은 이 품에서 불성에 대해서 부처님께 질문하여 사자후법문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사자후보살은 부처님께 불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우리가 불성을 볼 수 있는지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불성을 보는지를 통해 불성을 알게 하고 있다. 중생들이 불성을 보려면 복덕장엄과 지혜장엄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구족한다면 불성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혜장엄이고 복덕장엄인가.

첫째, 보살이 초지부터 십지에 이르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어 가는 것을 지혜장엄이라 하고, 보시바라밀로부터 내지 반야바라밀에 이르는 복덕을 갖추어 가는 것을 복덕장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복덕을 구족해 가므로 이중에서 반야바라밀을 제외한다고 한다.

둘째, 지혜장엄은 보살도를 갖추어 부처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복덕장엄은 성문과 연각과 9주보살처럼 불도에 들어가는 지혜를 내지 못하고 방편에 머무르게 하는 행을 말한다.

셋째, 복덕장엄은 유루의 선근공덕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존재들마다 유루의 업을 지어 그 과보가 있고, 도에 들어가는 장애가 있으며, 영원한 것이 아닌 범부들의 법이다. 지혜장엄은 무루법이므로 선악업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과보가 없으니, 걸림도 없어서 도를 장애하는 장도죄(障道罪)로부터 자유로우며, 영원한 법에 머물게 된다.

이 두 가지 지혜장엄과 복덕장엄이 이루어지면 한 가지와 두 가지를 알게 된다. 한 가지란 열반이요, 두 가지란 생사이다. 중생들은 생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애착과 무명에 쌓여 있어서, 생과 사가 서로 다른 두 가지라고 생각하고 열반에 대해서도 그 영원한 한 가지 도리를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지혜장엄과 복덕장암을 갖추어 갈 때 불성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열반경》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고 하고, 제일의공은 지혜라 한다. 보통 공에서는 공한 경지에 들어서 공한 것만을 알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이에 비해 지혜는 공한 것이나 공하지 않은 것, 항상한 것이나 항상하지 않은 것, 괴로운 것이나 즐거운 것, 나인 것이나 내가 없는 것을 본다. 결국 《열반경》의 제일의공의 지혜로 곧 중도인 셈이다.

경에서는 “온갖 공한 것만을 보고 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중도라 이름 할 수 없다. 중도는 불성이라 이름 하니 이런 뜻으로 불성은 항상 변하지 않거니와 중생들은 무명에 덮여서 볼 수 없게 한다”라고 하였다. 중생이란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며, 제일의공을 얻지 못하므로 중도를 행하지 못하고, 중도를 행하지 못하므로 불성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제일의공은 지혜이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먁삼보리의 중도종자라고 한다.

사람들이 중도를 보지 못하는 경우는 대략 3가지가 있다. 첫째 결정코 즐거운 행이요, 둘째 결정코 괴로운 행이며, 셋째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이라고 한다.

첫째의 결정코 즐거운 행으로 보는 것은 보살이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비록 지옥에 있더라도 3선천의 안락과 같이 여기는 경우이다. 둘째 결정코 괴로운 행으로 보는 것은 범부들로 생로병사 우비고뇌에 빠져 있다고 알기 때문이다. 셋째의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행이란 성문과 연각의 경우로 이들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행하면서도 이를 중도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성문 연각들은 비록 불성이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도에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상(上)·중(中)·하(下)가 있다. 하의 경우는 범천이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잘못 보는 것이요, 상의 경우는 생사가 무상함을 항상하다고 보고 삼보가 항상함을 무상하다고 잘못 여기는 것이다. 중의 경우는 무상한 것은 무상하다고 보고, 항상한 것은 항상하다고 보니 이를 제일의공이라 한다.

생사의 본제(本際)에는 무명(無明)과 애(愛)가 있다. 이 무명과 애의 중간에 생·로·병·사가 있으니 이를 정도 곧 중도라 한다. 이 중도를 얻어야 생사를 깨뜨릴 수 있고, 이 중도의 법을 불성이라 이름 한다. 그러므로 불성은 항상하고 안락하고 나이고 청정하지만, 중생들은 이를 보지 못하고 무상하고 안락하지 않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이를 비유하면, 어떤 가난한 사람의 집에 보배[寶藏]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를 보지 못하므로 무상하고 안락하지 않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못하게 살았다. 어느 날 선비가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숨은 보배가 있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빈궁하고 곤고하게 살아 무상하고 안락하지 않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선비는 방편으로 보배를 보게 하니 항상하고 안락하고 나이고 청정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불성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보지 못하여 무상하고 안락하지 않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못하거니와, 선지식인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방편으로 가르쳐 보이면 중생들이 항상하고 안락하고 나이고 청정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lkiwoon@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