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 사상을 핵심을 찌르는 어조로 표현한 곳이, 마치 하나의 격률Diktum로 표현한 곳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둘째 장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1.절 끝부분에서이다. 주지하다시피 죽음이 거기에 포함된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의 자세가 초인간의 자세이므로 초인간의 자세는 일평생에 해당하는 자세일 수밖에 없으나, ‘영원회귀’는 초인간의 일평생에 해당하는 자세를 바탕으로 해서 [간단히 초인간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영원히 되풀이 되는 인생에 해당하는 자세에 관해서이다.


권력의지를 기준으로 할 때, 초인간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권력의지를 발언한다. [초인간 사상보다, 죽음에 대범한 자세인 ‘자발적 몰락의지의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관점주의를 발언한다] 힘의 증대를 기준으로 할 때, 초인간 사상보다 영원회귀 사상이 더 강력한 ‘힘의 증대’를 발언한다. 초인간 사상의 적분이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 사상의 미분이 초인간 사상이다. 초인간 사상이 ‘일평생’의 자세로서 유한한 자세를 말할 때, 영겁회귀 사상은 ‘무한한 자세’를 말한다. 영원회귀 사상의 열쇠어 중의 열쇠어가 영원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죽음이 거기에 포함된 ‘대지에 대한 전면적 긍정의 자세’가 일평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영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동일한 것이 영원히 그리고 영원히 되풀이되어도 똑같이 그대로 살아주겠다는 자세가 영원과 관계하는 자세가 아닐 리 없다. 그렇더라도 구제형이상학을 기준으로 할 때 영원회귀 사상과 초인간 사상에서 ‘질적 차이’, 혹은 질적 우위를 말할 수 없다. 다음이 영원회귀에 관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니체-차라투스트라의 토설이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관하여> 1.절 끝부분이다.

용기는 그러나 최고의 살해자이다. 공격하는 용기는 죽음조차 때려죽인다, 그럴 것이 그는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이었더냐? 좋다! 한 번 더!” [강조는 필자]

죽음조차 살해하는 용기에 관해 말하고 있다. ‘죽음조차 살해하는 용기’는 죽음을 덧없게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삶을 무상하게 하는 것이 아닌, 죽음을 무상하게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정확히 구제형이상학이다! 인용문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이 큰따옴표 친 강조 부분이다. 영원회귀에 대한 정확한 해설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인생이었더냐?War das das Leben?”는 생로병사의 잔혹성과 관계한다. 여기에는 초인간 사상이 여전히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인생이었더냐?’에 이어지는 것으로 ‘좋다! 나는 죽음을 포함한 삶 자체를 전면적으로 긍정하노라’를 기대할 수 있고, 또한 죽음 자체를 무상하게 하는 자세로서 자발적 몰락의지, 즉 ‘좋다, 나는 기꺼이 몰락해주리라’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인용문의 통사구조로 볼 때 “좋다!Wohlan!”는 앞의 ‘이것이 인생이었더냐’에 걸릴 수 있고 뒤의 “한 번 더!Noch einmal!”에 걸릴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이었더냐’에 걸리는 경우 초인간 사상에 의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한 번 더’에 걸리는 경우 영원회귀 사상에 의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해설은 그러나 통사구조물들을 따로 떼어서 말할 때 가능한 것이다. 통사구조물들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강조된 구절들’ 전체를 두고 볼 때 이 문장의 통사구조는 앞의 구절 둘이 맨 뒤의 “한 번 더”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생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1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영원에 걸쳐 반복될 것을 요구한다. 한 번 더!가 영원히 반복되는 셈이다. 생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1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성으로 확대시킨 점, 이것이 영원회귀의 전말이다.

생사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을 영원성으로 확대시킨 것이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즉 똑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생사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을 강조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물론 ‘영원회귀 사상’은 매번 똑같은 인생이 되풀이되어도 똑같이 살아주겠다는 것으로서, 생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을 넘어 生死에 대한 전면적인 긍정이 무한히 계속되는 것에 관해서이다. 문제는 용기에 의한 자발적 몰락의지이고, 문제는 용기에 의한 ‘기꺼이 죽어주겠다’이다. 양이 질을 압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일회적인 자발적 몰락의지보다, 그러니까 일회적인 ‘죽음을 포함한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보다, 죽음을 포함한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을 무한수로 끌고 가는 것이, 그 많음으로 해서 진리(혹은 형이상학적 구제)에 육박하게 된다.

죽음을 포함한 삶에 대한 전면적 긍정이 무한수에 육박할 때 그 무한수로 해서, 혹은 ‘많음Vielheit’에 육박할 때 그 많음으로 해서, 그것이 말하는 것은 진리이거나 진리에 육박하는 것이 된다. 죽음을 포함한 삶의 전면적 긍정이 1회적인 것으로 해서 진리에 육박하는 것보다, 많음으로 해서 진리에 육박하는 것이 진리에 더 육박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질에 對한 양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 된다. 한 번의 긍정보다 많음으로서의 긍정이 긍정에 더 육박한다. ‘한 번 더!’가 무한히 반복될 때 이것은 양으로서 ‘삶의 비극성’(혹은 비극적 세계인식)을 넘어가는 것에 관해서이다. 단 하나의 비극성은 많음으로서의 비극성에 묻힌다.

-시인 · 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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