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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종 대들보 혜능 키워낸 동산법문 근본도량”
호북성 선종사찰 순례 ④·<끝> - 오조사
2016년 07월 28일 (목) 10:37:56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 오조사 진신전 법우탑(法雨塔)에 모셔진 오조 등신상. 진신상은 민국 초기 병화로 훼손됐다. 지금 등신상은 1985년 복원한 것이다.

사조사(四祖寺) 입구에는 원나라 때 건설한 길이 20m, 폭 6미터의 무지개다리(홍예교)가 있다. 영윤교(靈潤橋), 일명 화교(花橋)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까지 사조사를 참배하려는 이는 영윤교를 통해서만 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영윤교 아래는 폭포 같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사조사를 에둘러 내려온 물줄기는 이곳 영윤교에서 힘찬 소리를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진다.

차면 넘치고, 높으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의 속성이다. 눈 밝은 선지식의 회상(會上) 또한 그렇지 않을까? 선지식 회상에서 수많은 도인이 나오고, 그 도인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져 새로운 도량을 일구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될 어린 사자들을 길러내니 말이다.

사조 도신(道信, 580~651) 스님이 주석할 당시 이미 800여 칸에 이르는 당우와 1,000여 명에 이르는 납자들이 머문 대찰이었던 사조사는 홍인(弘忍, 601~674)이라는 걸출한 수행자가 출현함으로써 또 한 번 큰 물길을 나누게 된다. 사조로부터 달마 대사의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은 홍인 스님은 스승이 머물던 쌍봉산(雙峰山)을 떠나 머지 않은 빙무산(馮茂山)으로 거처를 옮긴다. 빙무산은 사조가 머물던 쌍봉산 동쪽에 있는데, 이런 이유로 사조 도신 스님이 제창하고 오조 홍인 스님이 꽃피운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칭한다.

사조사 방장 명기(明基) 스님의 환송을 받으며 영윤교 앞을 출발한 버스는 황매현 들판을 내달렸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된 번듯한 길이지만, 이 길은 그 옛날 노행자(盧行者, 육조 혜능)를 비롯한 수많은 수행자들이 법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천 리를 마다 않고 한걸음에 내달린 길인지도 모른다.

파릇파릇한 벼 줄기와 쭉쭉 뻗은 가로수를 어루만지며 내달리던 버스는 한 시간 남짓 만에 오르막으로 접어든다. 순례길이 마냥 편할 수만은 없다는 듯, 며칠 전 내린 비로 새로 닦은 아스팔트도로는 여러 곳 무너져 내려 있었다. 오조사(五祖寺) 일주문 앞에 도착하자 ‘한국불교 순례단의 참배를 열렬히 환영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뒤로 하고 유도(惟道) 스님을 비롯한 오조사 대중이 순례단을 맞았다.

순례단은 유도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곧바로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대웅보전엔 홍화선사, 노조사, 사조사 등 다른 고찰과 마찬가지로 고(故) 조박초(趙樸初) 중국불교협회 회장이 쓴 ‘대웅보전’ 편액이 걸려 있었다. 중국불교 부흥을 위해 노심초사한 고인의 숨결이 스며있는 듯했다.

   
▲ 대웅보전에서 예불하고 있는 순례단.

대웅보전을 참배하고 난 일행은 진신전으로 향했다. 진신전은 오조 홍인 스님의 진신상을 모신 ‘법우탑(法雨塔)’이 있는 전각이다.

홍인 스님은 황매현 사람으로, 속성은 주(周) 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23살 되던 해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사조 도신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출가에 얽힌 다른 인연 설화도 전한다.

한 도사가 도신 스님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깨치더라도 불법(佛法)을 널리 펴지 못할 것을 우려한 도신 스님은 “다시 태어나 동진출가하면 받아주겠다”고 답했다.

도사는 곧장 산을 내려와 빨래하고 있는 처녀에게 하룻밤 재워줄 것을 청하고, 처녀가 마지못해 응낙하자 곧장 뱃속으로 들어가 환생했다. 임신한 처녀는 집에서 쫓겨나 방직 일을 도우며 아이를 낳아 길렀다.

아이가 7살 되던 해 한 도인이 보고는 “칠종상(七種相)을 갖지 못했지만 곧 여래불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어느 날 도신 스님이 황매현에 나갔다가 아이를 보고 “성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불성”이라고 대답한 아이는 도신 스님이 다시 “너는 성이 없지 않느냐”고 묻자, “모든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속성이 없다”고 대답했다.

비범함을 알아챈 도신 스님은 모친을 찾아가 아이를 출가시킬 것을 간청했고, 모친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 아이가 바로 홍인 스님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26년간 정진한 홍인 스님은 당 고종 영휘 2년(651) 심인을 전해 받고 이곳 빙무산으로 자리를 옮겨 백련봉 정상에 선정사(禪定寺, 오조사의 전신)를 지어 후학을 길러냈다. 홍인 스님은 입적 한 해전인 당 고종 함형 4년(673) 제자 현색에게 자신을 탑신장(塔身藏)할 탑을 조성하라고 명한다. 이듬해 백련봉 아래 강경대(講經臺)에 탑이 완성되자 2월 21일 좌탈입망했다. 스님은 수많은 납자들을 길러냈는데, 10대 제자로는 신수(神秀, ?~706), 혜능(慧能, 638~713), 지선, 현색, 지덕, 법여(법지), 혜안(노안 또는 대안), 의방, 현약, 유주부가 있다.

홍인 스님은 중국 선종의 실질적 확립자로 평가된다. 스승이 주창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 가풍을 계승하고 총림제도를 확립하는 등 선종이 하나의 교단으로 자리하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선종의 소의경전을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 바꾼 분이기도 하다.

스님은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자성의 정체를 밝혀 망상을 그치게 하는 것〔背境觀心 息滅妄念〕이 곧 해탈”이라고 밝히고, “본래의 참된 마음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곧 열반의 근본이요, 불도에 들어서는 요체〔守本眞心爲 涅槃之根本 入道要門〕”임을 강조했다.

강경대에 있던 진신전은 ‘대만선사(大滿禪師)’라는 시호와 ‘법우탑(法雨塔)’이라는 탑호를 내린 당 대종의 명에 따라 보응 2년(763) 지금의 오조사 경내로 옮겨졌다. 그 뒤 북송 철종 원우 2년(1087) 오조 법연 선사가 진신전을 다시 지금 자리로 옮겨지었다.

진신전 안에 모셔진 법우탑은 2층 정방형 석탑이다. 석탑 안은 비어있어 그곳에 홍인 스님의 등신상을 모셨는데, 1927년 병화로 진신 상당 부분이 훼손된 후 문화혁명 때 완전히 훼손됐다고 한다. 지금 있는 등신상은 1985년에 새롭게 조성한 상이다. 강경대 아래에 있는 대만보탑은 1927년 홍인 스님의 진신이 훼손되자 뼈를 수습해 매장하고 파괴된 진신탑 대신 1932년 조성한 사리탑이다.

평소엔 법우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유도 스님의 배려로 순례단은 홍인 스님의 등신상을 배알할 수 있었다. 홍인 스님의 등신상에 예배하면서 비록 진신은 아닐지라도 치열하게 살다간 홍인 스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서 뜻 깊었다.

   
▲ 육조 혜능 스님이 8개월 간 수행한 방앗간터에 지은 전각인 육조전 내부.

   
▲ 육조전 내부에 있는 디딜방아 구멍과 새로 만든 디딜방아.

진신전을 나온 순례단은 유도 스님의 안내로 회랑을 따라 육조전으로 향했다. 오조사는 홍인 스님이 주석하고 입적한 행화도량이지만, 한편으로는 육조 혜능 스님이 출가하고 오도한 도량이기도 하다.

혜능 스님은 광동성 남해 사람으로 속성은 노(盧)씨다. 세 살 때 부친을 여읜 스님은 나뭇짐 장사를 하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느 날 탁발승으로부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발심해 홍인 스님을 찾아갔다.

홍인 스님은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느냐”는 혜능 스님의 말에 법기(法器)임을 깨닫고 수좌들의 눈을 피해 방앗간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묵묵히 방아를 찧으며 정진하던 혜능 스님은 사형 신수가 지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는 게송을 듣고, “보리수는 본래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불성은 한 물건이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게송으로 응수한다.

혜능의 그릇을 알아본 홍인 스님은 삼경(三更)에 방장실로 불러 법을 인가하고 초조의 의발을 전한다. 수좌들이 헤칠 것을 염려한 홍인 스님이 당부한 대로 혜능 스님은 황매현을 떠나 광동성 보림사와 초은사 등지에서 15년간 숨어지내다 남화선사에서 개당했다.

혜능과 신수의 게송이 붙어 있었을 법한 회랑을 따라 도착한 육조전 내부 벽에는 ‘혜능춘미처(慧能春米處)’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고, 디딜방아 구멍과 새로 만든 디딜방아가 남아있었다.

사실 육조전은 혜능 스님이 방아를 찧으며 수행한 당시의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 대종이 백화봉 꼭대기에 있던 선정사를 지금 자리로 옮겨 짓도록 명한 것을 보면 그러하다. 지금 건물도 문화혁명 이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할망정 옛 조사의 자취를 보존하고 기리는 것은 그의 삶을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일체 생사고를 여의려는 신심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조사는 창건 이후 역대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번창해 갔다. 오조사는 사조 도신 스님이 주석한 쌍봉산 동쪽 빙무산에 있는 절이라 하여 동산선사(東山禪寺), 혹은 동선사(東禪寺)로도 불렸다. 당 선종 대중 2년(848) 칙명으로 현재 자리로 가람을 옮긴 뒤엔 대중동산사(大中東山寺)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송 진종 경덕 연간(1004~1007)에 진혜선사(眞慧禪寺)로 불리던 오조사는 원 문종 지순 2년(1331)에 ‘동산오조사(東山五祖寺)’로 다시 바뀌어 지금 이름을 갖게 됐다. 이밖에 북송 영종(재위 1063~1067)과 휘종(재위 1100~1125)은 ‘천하조정(天下祖庭)’과 ‘천하선림(天下禪林)’이라는 편액을 각각 하사하기도 했다. 두 편액을 새긴 석비가 오조사 대웅보전 앞마당 한 켠에 서있다.

그러나 오조사 또한 중국의 다른 사찰처럼 문화혁명의 참화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쫓겨나야 했던 스님들은 1979년이 돼서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몰수됐던 토지를 되찾고 당우를 신축하는 등 선종 본찰로서의 사격을 되찾아 가고 있다.

오조사 도량 내에는 홍인 스님의 어머니를 모신 성모전과 초조 달마로부터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 스님을 모신 조사당이 있고, 빙무산 산내에는 홍인 스님이 처음 개창한 선정사터, 홍인 스님이 좌선하던 수법동(守法洞) 등이 남아있지만 일정에 쫓겨 주마간산(走馬看山)하듯 오조사 경내만 참배하고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래 머물지 못한 상황이 아쉬울 뿐이다.

버스에 오르니 문득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나온다는 홍인 스님과 한 수좌의 문답이 떠올랐다.

“왜 한적한 산속에 머물며 불법을 공부해야 하느냐”는 수좌의 물음에 홍인 스님은 “큰 집의 대들보는 본래 심산유곡에서 나온다”고 대답했다.

깊은 산속의 나무는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어 큰 집 대들보로 쓰일 재목으로 자랄 수 있듯, 세상의 이름과 이익을 피해 깊은 산중에서 자성을 찾아 수행정진하는 것이 육조와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오조사 같은 선림(禪林)을 가꾼 원동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가 수행자의 본분은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 해탈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길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로지 수행자 스스로 감당해야 할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눈에서 멀어지는 빙무산을 바라보며, 옛 조사들의 행화도량을 참배하는 순례 여정은 큰 집의 대들보가 되어 불조의 혜명을 잇고, 만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구도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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