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조전에 모셔진 도신 스님의 등신상.

중국 선종은 달마 대사로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4조 도신(道信, 580~651) 스님과 5조 홍인(弘忍,602~675) 스님 때부터라고 한다. 4조 도신 스님이 개창하고 5조 홍인 스님이 계승한 ‘동산법문(東山法門)’으로부터 중국 선종의 모든 계파가 비롯됐기 때문이다.

중국 호북성 선종사찰 순례에 나선지 3일째. 순례단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숙소를 나섰다. 차량에 몸을 맡긴지 40분 남짓, 버스는 어느덧 쌍봉산(雙峯山)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사조사(四祖寺)가 눈앞에 들어왔다. 사조사는 그 이름처럼 4조 도신 스님이 주석하던 사찰이다.

‘사조정각선사(四祖正覺禪寺)’라는 현판이 걸린 산문전(山門殿) 앞에 다다르자 40대 젊은 방장 명기(明基) 스님이 내리는 비도 아랑곳 않고 우산도 들지 않은 채 마중을 나왔다.

명기 스님의 은사는 지난 노조사 편에서 소개한 정혜 스님이다. 명기 스님은 2009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백양사에서 10여일 간 간화선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 사조사 전경.

▲ 원나라 때 건립된 돌다리 영윤교.

사조 도신 스님 행화 도량 사조사

사조사는 도신 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호북성 황강시 황매현 현정부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5km쯤 떨어진 쌍봉산 자락에 있다. 사조사의 원래 이름은 산문전 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각사(正覺寺)’였다고 한다. 산 이름을 따 쌍봉사(雙峰寺)로도, 한때는 유거사(幽居寺)로도 불렸다고 한다.

도신 스님은 일곱 살에 출가했다. 열네 살 때인 수 문제 개황 13년(593)에 서주 환공산에서 3조 승찬(僧璨, ?~606) 스님에게 불법을 배웠다. 개황 20년(600)년 무렵 승찬 스님은 도신 스님에게 의발(衣鉢)을 전한 뒤 광동성 나부산에 은거했다.

스승과 헤어진 도신 스님은 수 양제 대업(605~618) 연간에 강서성 길주에 머물다가, 호남성 형산과 강서성 여산 대림사를 거쳐 당 고조 무덕 7년(624)에 이곳 쌍봉산에 들어왔다고 한다.

도신 스님이 쌍봉산에 터를 잡게 된 설화는 자못 신이롭다. 절터를 찾던 도신 스님이 쌍봉산의 상서로운 기운에 이끌려 며칠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노인이 다가와 사연을 물었다. 스님이 “가사 한 벌 놓을 만한 땅에 절을 짓고자 한다”고 말하니, 그 노인이 “기꺼이 시주하겠노라” 약속했다 한다. 노인의 말을 들은 도신 스님이 가사 한 벌을 던졌는데, 가사가 덮은 땅이 사방 십리였다고 한다.

그렇게 쌍봉산 자락에 사조사를 세운 도신 스님은 이곳에서 동산법문을 개창하고 30여 년간 후학들을 제접했다고 한다. 당시 스님을 따르는 이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신 스님은 이곳에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참선 수행을 병행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수행가풍을 세웠다. 훗날 백장 회해(百丈 懷海, 749~814) 스님이 내세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청규도 기실 백수십 년 전에 이미 도신 스님이 제창한 것이다. 스님은 평소 “좌선에 힘쓰되 15년은 일해야 한 사람의 먹거리를 얻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동산선문 개창 선농일치 주창

스님에게서 시작돼 홍인 스님에게서 꽃피운 동산법문은 선(禪) 사상과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규범을 체계화한, 중국 선종에서 처음 나타난 교단이라 한다.

도신 스님은 의술에도 조예가 깊어 산과 들로 다니며 약초를 캐고 직접 맛을 본 후 그 효능과 용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의서가 《초목집성(草木集成)》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이시진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지을 때 민간에 전하던 도신 스님의 약초 표본을 참고했다고 한다.

이름이 높아지자 당 태종이 네 차례나 불렀으나 스님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당 고종 영휘 2년(651) 스님은 홍인 스님에게 의발을 전하고 입적했다. 이후 당 대종은 스님에게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와 자운(慈雲)이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한다.

도신 스님이 창건한 사조사는 번창했으나 청 함풍 4년(1854)년에 전쟁으로 파괴되고, 광서제(1875~1908) 때 복구됐다가 다시 피해를 입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옛 건축물은 당대에 건립된 비로탑(毘盧塔)과 송대에 건립된 노반정(魯班亭, 일명 衆生塔), 의발탑(衣鉢塔), 원대에 건립된 영윤교(靈潤橋), 청대에 중건된 사조전(四祖殿), 자운각(慈云閣) 정도라고 한다.

사조사가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은 본환(本煥) 스님에 의해서다. 스님은 1995년부터 5년 동안 천왕전, 대불전, 관음전, 지장전, 화엄전, 조당, 장경루, 종고루 등 30여 개 전각을 복원했다고 한다.

상수제자 신라 구법승 ‘법랑’

▲ 재가선방으로 쓰이고 있는 자운각(위)과 재가선방 내부(가운데), 재가불자들의 교육장소로 쓰이고 있는 쌍봉강당(아래).
2003년에는 정혜 스님이 방장 소임을 맡아 4조 도신 스님의 행화 도량에 걸맞게 선 수행 사찰로 사격을 일신시켰다. 스님은 선문화잡지 <정각>을 발행하고, 신도와 청년 불자들을 대상으로 좌선 모임, 여름 캠프 등 행사를 개최하는 등 선불교 중흥에 앞장섰다. 정혜 스님은 입적했지만 스님의 노력은 지금도 이어져 산문전 오른편 자운각에서는 재가선방인 ‘쌍봉선당(雙峰禪堂)’이 운영되고 있다.

대웅보전에 들러 예를 올린 순례단은 방장 명기 스님의 안내를 받아 대웅전 뒤편 벽면으로 향했다. 그곳엔 액자 형태의 사조사 역대 법맥도가 걸려 있는데, 명기 스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신라법랑(新羅法朗)’이라는 글자가 뚜렸했다. 도신 스님의 상수 제자 중 한 분인 법랑(法郞, 생몰년 미상) 스님이다.

법랑 스님은 신라에 처음으로 선을 들여온 분이다. 생애와 행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인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 스님의 비에 법랑 스님이 도신 스님에게서 법을 배우고 돌아와 귀국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신행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자 당 유학길에 올라 북종 신수 스님의 제자인 보적(普寂) 스님의 문인 지공(志空) 스님에게 가서 3년 동안 공부하고 법을 이었다. 신행 스님의 법맥은 다시 준범, 혜은 등으로 이어져 9세기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으로 결실을 맺는다.

대웅보전에서 벗어난 순례단은 사조전으로 향했다. 도신 스님의 등신상이 모셔진 전각이다. ‘자비의 구름이 되어 지혜의 비를 뿌렸다’는 뜻의 ‘자운혜우(慈雲慧雨)’ 자수가 등신상 앞에 드리워져 있다. 도신 스님의 덕화를 상징하는 글귀다.
현재 사조사에는 30여 명의 대중 스님이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또 산내 암자에는 50여 명의 비구니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사조사 방장 명기 스님은 이곳에 2020년까지 초조 달마대사부터 육조 혜능 스님까지 6대 조사를 모시는 53m 탑을 조성할 계획이다.

쌍봉산 산내에는 이밖에 도신 스님이 오조 홍인 스님에게 법을 전했다는 전법동(傳法洞)과 도신 스님의 진신을 모셨다는 비로탑, 도신 스님의 의발을 모셨다는 의발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참배의 연은 닿지 않았다. 비로탑은 높이 11m의 정방형의 전탑으로 당나라 때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탑 안에는 도신 스님 진신상과 함께 신라 법랑 스님의 상도 함께 모셔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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