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은 원효의 동시대인이지만 원효가 수많은 논소를 저술하여 그의 예지를 빛낸 반면, 의상은 오히려 말을 적게 하고 뜻을 함축함으로써 원효와 대조를 이룬다.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의 핵심인 일승법계연기(一乘法界緣起)를 총 210자(字) 7언(言) 30구(句)로 압축시킨 후 하나의 도형(圖形)으로 형상화(形象化)한 것인데, 상하좌우로 회전하는 형태라는 특징을 가진다.1)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까지의 210자를 가운데에서부터 일렬로 배열(配列)하는 한편, 첫 글자인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법(法)’과 마지막 글자인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의 ‘불(佛)’이 다시 이어지도록 하여 출발한 곳이 마침내 끝나는 곳이고, 끝나는 곳이 다시 출발하는 곳이라는 의미(意味)를 내포(內包)하고 있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말한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 …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들어와 있고,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들어와 있으며,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고, 모든 티끌 중에도 역시 이와 같다. …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정각의 시간, 생사와 열반이 항상 어울리고, 이(理)와 사(事)가 명연하여 별개의 것이 아니니, 십불과 보현대인의 경계이다.2)

위의 말은 의상의 우주관이요 인생관인데, 이의 논리는 곧 전체(全體)와 개체(個體)를 대립적(對立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개체의 융섭(融攝的)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즉 전체를 그저 전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전체가 아닌 것이요, 하나를 그저 하나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가 아니다. 본래 진리, 즉 우주나 세계인간의 참 모습은 본래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는 것이다. 즉 유(有)·무(無)·긍정(肯定)·부정(否定)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의상에 의하면 법(法)이란 범부(凡夫)의 5척되는 몸과 마음이며, 성(性)은 범부 오척 몸의 부동(不動)인 무주(無住)이다. 다시 말해서 범부의 몸은 분별이나 배제의 요동 없이 본래 고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범부는 곧 법신이고, 티끌은 곧 수미산이며, 중생은 부처가 된다.3)

그렇기 때문에 법성(法性)은 원융(圓融)하여 두 모습이 없고, 제법(諸法)은 부동(不動)하여 본래부터 고요한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고 청정한 본래의 모습을 한정하여 이름 짓는데서 진리는 두 갈래로 분열되고, 따라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 안에 일체(一切)요, 다(多)안에 하나인 것이다. 하나가 곧 일체, 다(多)가 곧 하나라는 창조(創造)의 논리이다. 이미 하나라고 말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으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곳에 이미 새로운 창조가 싹트게 되는 논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 동질성(相卽)과 상호의존성(相入) 아래 불가분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거대하고 치밀한 ‘관계의 그물망’이라는 관점으로 이 세계를 파악하는 화엄적 연기관 속에서, 의상은 ‘다양성의 평화로운 공존공생과 상호존중’, 그리고 ‘하나됨의 통일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대통합의 사상적 원리를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경지에서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4)

현재의 상(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다시 말해서 현상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화엄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현상에 실체가 있다고 보는 실상(實相)을 중시하는 입장이 있고,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고 보는 가상(假相)을 중시하는 입장이 있다. 실상과 가상에 따라서 화엄사상가들이 나누어진다고 할 때, 의상은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여, 특수(特殊)와 가상(假相)을 중시하는 논리를 펴고, 법장은 전자의 입장을 주장하여 보편(普遍)과 실상(實相)을 중시하는 논리를 편다. 의상은 현상계는 가상(假相)이므로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하나를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관조(觀照)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법장은 현상계를 실상(實相)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 하나하나의 모습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의상은 자신의 화엄사상을 신라사회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던 통합과 화쟁을 위한 실천적 해법으로 삼고 있는데 그 통합과 화쟁의 존재론적 근거는 성기(性起)사상이다. 의상에 의하면 성기란 ‘연(緣)을 따르지 않음’이다. 다시 말해서, ‘연을 따름’이란 근본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사물을 정신적 실체(名)와 물질적 실체(色)로 간주하여 존재와 비존재로의 변화를 소유와 집착으로 경험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연을 따르지 않음’이란 사물을 사실대로 이해하는 지혜에 의해 무아(無我)․공(空)의 관점으로 세계를 무소유․무집착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화엄의 연기적 세계관으로 볼 때 이 세계의 모든 존재, 모든 현상들은 예외 없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는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이라는 동질성과 상호의존성[緣起]의 관계로 복잡하게 연결된 거대한 그물망이다. 한 순간 한 티끌의 존재는 그 순간의 모든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다. 한 티끌로 인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동시에,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한 티끌의 존재를 위해 작용한다. 의상은 이 화엄적 연기관의 핵심을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들어와 있고, 모든 것 가운데 하나가 들어와 있으며,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의상은 화엄사상 외에도 관음신앙(觀音信仰)과 미타신앙(彌陀信仰)의 확산에도 힘썼다.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은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하고 다가설 수 있었던 만큼, 의상이 이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상의 노력은 삼국 통일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민중들의 삶에 위안을 주고 사회 안정에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의상의 화엄일승 사상에 대해서는 1970년대부터 이기백, 김문경, 김두진 같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은 신라 중대 전제 왕권을 확립시키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불교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김상현, 남동신, 정병삼 같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의상이 《화엄일승법계도》에서 밝힌 것은 연기의 본질일 뿐이며, 오히려 의상의 화엄 사상은 모든 대립물 간의 본질적인 무차별성, 즉 평등성을 강조하였다는 반론이 이기백 등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제기되었다. 이후 의상 화엄사상의 전제왕권 이념설’에 대한 논쟁은 90년대 후반까지 역사학계와 불교학계를 중심으로 계속되었는데, 현재 30년 가까이 계속된 의상 화엄에 대한 논쟁의 추는 불교학자들의 주장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개론서에는 70년대 학설이 그대로 실리고 있다. 따라서 불교학계에서는 일반인들의 균형 잡힌 불교사 인식을 위해서라도 의상 화엄사상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5)

주) -----
1) 《華嚴一乘法界圖)》(《韓國佛敎全書》 2권), p.1a.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2) 《華嚴一乘法界圖)》(《韓國佛敎全書》 2권), p.1a.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3) 해주(海住), 《화엄의 세계》(민족사, 1998), p.309.
4) 박태원, 《의상의 화엄사상》(울산대학교 출판부, 2005), pp.14~15.
5) ‘의상화엄의 전제왕권 이념설 논쟁’, <법보신문, 2005년 2월 14일 자>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010811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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