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네 번>(이탈리아, 2010)의 의미는 네 번의 삶을 의미합니다. 늙은 목동의 삶과 죽음, 그리고 아기 염소와 전나무의 삶과 죽음, 그리고 숯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각각의 삶은 균등한 가치를 갖습니다. 인간인 늙은 목동의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광물인 숯은 가볍게 다루거나 하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은 ‘세상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가치관을 표현하는데 굉장히 적절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네 개의 소재를 네 개의 장으로 구성해서 그들 각자를 주인공으로 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사가 들어가게 되면 인간 중심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

대신 주인공들의 삶의 소리로 채워 넣었습니다. 염소의 청량한 방울소리, 개 짖는 소리, 성당의 종소리, 심지어 성당지기의 빗자루 질 소리, 늙은 목동의 기침소리, 숯이 타는 소리, 전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아기 염소의 가녀린 울음소리, 엄마 염소의 우렁찬 소리 등 너무나 많은 소리들로 영화는 활기찬 편입니다.

바람에 쓸리는 나뭇잎 소리나 숯이 타들어가면서 나는 소리는 경건함을 느끼게 했고, 아기 염소의 울음소리에서는 안타까움이나 절규 등의 감정을 경험했으며, 염소 목에 매달린 방울 소리는 너무나 경쾌해서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물론 소리 가운데는 인간의 말소리도 있습니다. 늙은 목동이 사는 동네 사람들의 말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언어라고 해서 해석이 필요한 소리는 아닙니다. 감독은 사람의 말소리도 배경음처럼 처리했습니다. 아기 염소의 울음소리나 전나무 가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나 숯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마찬가지로 음향효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사를 부여하지 않고 말소리도 배경음으로 처리한 것은 그의 만물 평등사상을 보여주는 정말 좋은 방식이었습니다.

<네 번>은 이탈리아 출신의 신예감독인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 영화로 그는 2010년 칸느영화제 비경쟁부문인 감독주간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타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있는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최남단인 칼라브리아의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늙은 목동과 그가 몸담고 있는 작은 마을, 그리고 염소와 숲으로 이뤄진 일상을 롱 테이크로 아주 천천히 보여주고 있지만 앞에서 말했던 일상의 생기 있는 소리들은 이런 지루함을 달래주었습니다.

늙은 목동을 통해 본 죽음

첫 번째 주인공은 늙은 목동입니다. 그는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깝게 여겨질 정도로 늙었습니다. 그늘에 앉아있는 모습은 숨을 멈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삶에 대한 미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염소젖을 들고 성당에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우유와 약을 바꿔왔습니다. 그가 약이라고 믿는 것은 놀랍게도 교회 바닥에서 모음 먼지였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쓰레받기에 먼지를 모아 그걸 종이에 담아 늙은 목동에게 주는 모습은 종교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동은 교회에서 얻어온 그 먼지 약을 잃어버렸습니다. 잠들기 전에 먼지를 물에 타 마시는 습관을 가졌던 목동은 다급해져서 교회로 달려갔지만 교회문은 굳게 닫혀있고, 약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먼지 약을 먹지 못한 목동은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풀을 뜯어먹으러 나갈 시간이 됐는데도 목동이 일어나지 않자 늙은 목동의 침대로 염소들이 몰려왔습니다. 염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동은 힘겨운 숨을 몇 번 내쉬더니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늙은 목동이 죽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정말 별 거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숨이 멈추는 것이 죽음의 전부였습니다. 슬픔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심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으로 몰려온 염소들 때문인지 사람의 죽음도 동물의 죽음처럼 그저 자연의 일환으로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아기 염소의 일생

죽음이라는 거창한 통과의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숨 한 번 멈추는 것으로서 삶과 죽음 사이를 훌쩍 뛰어넘은 늙은 목동처럼 새끼 염소의 탄생도 좀 시시했습니다. 아기 염소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어미가 옆에서 가끔 이마를 핥아주었지만 나머지는 새끼 염소 몫이었습니다. 아기 염소는 일어서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약해 보이는 다리로 불안정하게 걸었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어미젖을 찾았습니다. 생명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어미 염소와 함께 밖으로 풀을 먹으러 갈 때는 안됐습니다. 다른 아기 염소들과 함께 우리에서 놀면서 어미 염소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아기 염소들은 장난감 하나 없어도 재미있게 잘 놀았습니다. 벽돌 위를 서로 올라가려고 다른 염소들을 밀어내면서 지치지도 않고 놀았습니다. 어미를 기다리며 동무들과 놀던 이때가 아기 염소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해가 기울어지면 멀리서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고 이내 풀을 먹으러 나갔던 어미 염소가 돌아왔습니다. 이때 이들은 서로 반갑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사람 말소리처럼 뚜렷하게 의미가 전달됐습니다. 동물의 울음소리가 의성어가 아닌 의미어로 들린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아기 염소들은 가녀린 울음소리로 ‘엄마 어서 와요. 젖 주세요.’ 하고, 어미 염소는 굵고 높은 소리로 ‘우리 새끼 잘 있었어? 엄마가 맛있는 젖 줄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이 장면도 이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동물의 삶도 사람의 그것과 다를 것 없다는 걸 일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 아기 염소도 어른들과 함께 밖으로 풀을 먹으러 갈 때가 됐습니다. 그런데 아기 염소는 외출 첫날 그만 도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어미를 비롯해서 일행은 모두 저 멀리 가버렸는데 혼자 도랑에서 나오지 못한 아기 염소의 절규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안타깝게 들렸습니다. 감독은 잔인하게도 아기 염소의 울음소리를 꽤 오랫동안 들려주었습니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아기 염소의 울음소리는 ‘제발 살려 주세요.’ 하는 울음소리였습니다. 살고 싶다는, 생에 대한 의지의 소리였습니다. 늙은 목동이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교회 바닥의 먼지에 집착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도랑을 빠져나왔지만 일행은 놓쳤고, 아기 염소는 혼자서 산을 떠돌게 됐습니다. 아직 어린 아기 염소는 산을 돌아다니다가 전나무를 발견하고 그 아래에서 잠들었습니다. 그 후 아기 염소가 어떻게 됐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젖을 찾았던 것처럼 생에 대한 강한 의지로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높고 험준한 산에 홀로 버려진 아기 염소가 사는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외롭고 버거운 것입니다.

전나무와 숯을 통해 본 ‘재생’

이번 장의 주인공은 전나무와 숯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눈 덮인 겨울을 보내고 그리고 또 몇 번의 겨울을 보내면서 전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하늘 높이 곧게 뻗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더니 이어 톱 소리가 들리고 전나무는 잘려나갔습니다. 전나무는 축제에 쓰이기 위해 베어졌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나무는 숯장수에게 팔려가 몇날며칠 가마에서 숯으로 재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숯은 다시 마을 사람들의 가정으로 팔려나갔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사라져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전나무와 숯’ 장에서는 죽음에서 다른 삶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끝이 아닌 것입니다. 전나무는 죽었지만 가마에서 숯이라는 새로운 물질이 탄생했고, 그것이 각 가정에서 연료로 쓰였으며, 늙은 목동이 약으로 알고 먹었던 먼지 또한 숯이 타면서 나온 재였습니다. 이렇게 한 생명체는 끊임없이 몸을 바꿔가며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전나무였다가 숯으로 바뀌고, 또 약으로 재탄생하고, 끊임없는 변형을 통해 영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많이 닮았습니다.

영화 <네 번>은 죽음도 탄생도 참 가볍게 다뤘습니다. 죽음은 숨 한 번 거두면서 세상과 하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지금까지 본 어떤 죽음보다도 좋았습니다. 공연히 죽음을 너무 거창하고 두렵게 생각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는데 공연히 어렵게 생각함으로써 죽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볍고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죽음은 그런 모습이었고,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탄생 또한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세상에 던져졌고, 염소처럼 전나무처럼,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고, 다른 생명체에게 많이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영화는 겸손함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cshch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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