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음식점들의 간판을 보고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 흔한 통닭집이나 돼지국밥집, 순대국집, 삼겹살이나 소갈비집들. 이런 음식점들의 간판을 보면, 거개가 동물 캐릭터가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가게든, 동물들은 의인화되어 있고, 웃고 있거나 사람을 반기는 표정들이다. 그간 이런 캐릭터가 눈에 익어 꽤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어느 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기 동물은 아무 죄도 없는데, 사람의 입맛에 의해 강제로 사형집행 당한 것이다. 뿐인가. 동물은 죽은 다음에도 제 시신은 인간에 의해 조각내어지고 분해된 뒤, 뜨거운 기름에 튀겨지거나 아니면 불에 태워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냉정히 말해, 통닭집 등은 닭들이 살벌하게 능지처참을 당한 뒤 시식이 되는 장소다. 그런데도 음식점 간판에는 닭이나 소나 돼지가 손님들을 반가워하며, 상냥하게 웃고 있는 모습들을 내보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억울하게 죽어나간 소나 돼지 등의 입장을 생각하면, 전도가 된 사고방식의 표현이 아닌가. 이건 분명 잘못된 의식의 표현이다. 소나 돼지의 웃음을 주인의 모습을 상징하거나 가장한 표정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음식점 주인이 소나 돼지의 모습으로 웃는다고 생각하면, 이건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가 되고 만다. 간판에 돼지나 소가 입맛을 다시는 모습도 있는데, 이건 정말 가관이다. 이것은 제 죽음을 맛보고 즐기라는 표정이 아닌가. 그야말로 엉터리 작태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아주 ‘불경스런’ 간판들이다.

실상 소나 돼지나 닭이나 오리들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요, 의식이 있는 존재다. 이런 동물들을 키워본 사람이면 능히 안다. 동물도 삶에 애착이 있고 제 살아있음을 즐기고 싶어 한다. 이런 상식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간판에 웃는 동물의 모습을 담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고기 집 간판들을 보면, 사고와 감정의 천박성을 드러낸 것으로 밖에 안 비친다. :이왕 간판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어느 국밥집에서는 간판전면에 주인 초상화를 내걸고 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심각하다. 무슨 까닭에 주인 여자는 그렇게 심각하고 뚱한 표정을 자랑처럼 내세우고 있는가. 어떤 경우엔 짙은 화장에 아예 퉁퉁 부은 얼굴표정이다. 병원 선전을 하는 간판엔 의사들은 하나 같이 팔짱을 끼고, 역시 심각하고 좀 오만해 보이는 폼들을 잡고 있다. 좀 친절하고 밝은 표정을 지으면 안 되나. 다른 나라에서는 잘 볼 수가 없는 간판 캐릭터다.

동물을 키울 때, 더럽고 폐쇄적인 울안에서의 가학적인 대우도 사실 큰 문제다. 미국 오레곤 주의 한 기업 농장에서는 송아지가 태어난 뒤 바로 좁은 박스 안에 가둬놓고는 6주 만에 도살을 집행한다고 한다. 수천 개의 박스가 들판에 바둑판처럼 빽빽하게 들어서있다. 들판에서 송아지들이 어미를 찾으려 울부짖는 소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진다. 우리 역시 동물 학대에 둔감한 문화에 살고 있다. 키우던 개를 함부로 길가나 숲가에 내다버리는 풍토도 큰 문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의식이 누적이 되어, 우리의 간판 문화에 우습지도 않은 동물 캐릭터로 반영이 된 것이리라. 지금의 간판 문화가 다른 분위기로 바뀔 여지는 없나.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이는 결코 별 일 아닌 것이 아니다. 인간 무의식에 끼치는 그것의 영향이 결코 작지가 않아서다. 은근히 왜곡된 인식을 조장시키는, 그런 간판의 시각적 영향으로 자라나는 세대에게 혹여 생명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선다.

-시인 · 블레스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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