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6일 이역만리 영국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 콩쿠르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문학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낭보였다. 매년 노벨문학상 발표 때마다 ‘혹시나?’하고 기다리다 실망했던 한국 문학인들은 모처럼 만의 쾌거에 모두 제일처럼
기뻐했다.

이 상은 영연방국가 내에서 영어로 쓴 소설 중에서 수상작을 선정하는 ‘맨부커상’과 비영연방 작가와 번역자에게 시상하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으로 나뉘는데, 2016년 수상작으로 한국 작가 한강(韓江)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The Vegetarian》(데보라 스미스 번역)이 선정된 것이다.

요즘 소설이 예전에 비해 훨씬 가볍고 말초적인 흥미만 추구하는 사소한 이야기로 흘러 독자들이 한국소설을 외면한다는 우려가 깊어지던 무렵 한강의 수상 소식은 독자들의 관심을 다시 끌어당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판매부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다가 수상작으로 결정된 후 주문이 폭주했다는 전언은 한국문학의 중흥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단숨에 읽었다. 그만큼 가독성이 높은 작품이란 얘긴데, 하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독서 시간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 여성이 육식을 거부하고 철저히 채식을 고집하다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는 서사가 남편과 형부, 언니의 시점에 의해 서술되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폭력의 정체를 예리하고 통렬하게 고발한 것으로 읽힌다. 한 여성이 채식만을 고집하는 데는 아버지, 남편으로 상징되는 남성과 가족의 폭력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 개인의 섭식 자유마저 포용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중증환자로 몰아가는 제도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말에는 “남의 살이 맛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육류 섭취가 어려웠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끔찍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채식(菜食)’은 ‘육식(肉食)’으로 상징되는 것들, 이를테면 동물적‧공격적‧남성적‧제도적 폭력과 이동성(nomad)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식물적‧수동적‧여성적 저항과 정착성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분법적 분류는 지나치게 도식적인 흠이 없지 않으나, 이 소설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일정한 지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서구적/동양적’ 혹은 ‘근대적/반근대적’이란 언표로 해석된다.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영혜’는 부모와 남자 형제, 남편 등의 억압과 폭력에 복종하지 않으며 저항하는 독특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인도의 간디가 실천했던 불복종 저항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상대의 폭력이 도를 넘어설 때 적극적으로 저항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 곳에 뿌리 내린 채 움직이지 않고 모든 자연의 위해로부터 공격만 당하는 것 같은 초목이 실제로는 어떤 존재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종족을 보존하며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사실에서 식물의 힘을 역설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초목은 가장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물로 인식되어왔다. 식물은 생태계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생산자로 1차 소비자인 초식동물의 삶을 가능케 한다. 생태계를 피라밋의 수직구조로 파악하면 식물은 열등한 존재가 되지만, 그것 없이는 다른 생명체의 존재가 불가능해진다고 볼 때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까지 ‘근대화’란 미명하에 앞만 보고 달리거나 이리저리 떠돌며 어떻게든 상대보다 더 나은 자리를 쟁취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한 자리에 멈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순간을 가질 때가 되었다. 소설 주인공은 가축이 강제로 살륙당할 때의 절망과 고통을 자기화하여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적 삶을 선택했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제것처럼 여기는 그 마음이 보살정신과 통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동국대 문창과 교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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