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차 때문에 망한 슬픈 나라 티베트 - 명청 시대의 한장(漢藏) 차마무역1)

1) 한장 차마무역의 기원

중국(中國)은 방대한 다민족(多民族)국가로서 티베트(西藏)2)와는 일찍이 당(唐)나라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어 왔다. 군사력에 있어 당나라와 거의 대등(對等)한 위치에 있던 투뽀(吐蕃:티베트)3)왕국은 수시로 당(唐)나라 변경을 침략하여 당나라 왕실에 공주를 시집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견디다 못한 당 태종(太宗)은 정관(貞觀) 15년(서기641년)에 드디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투뽀의 대왕(짠푸・贊普)4)인 쏭짠깐뿌(松贊干布)에게 출가시켰다. 이 시기는 바로 중국 내지(內地)의 차(茶)가 티베트(西藏)으로 전파되는 시기이기도 하며, 티베트인의 음차(飮茶) 기원(起源)이 되기도 한다.

그 후에도 당(唐) 중종(中宗) 경륭(景隆) 원년(707년)에 금성공주(金城公主)가 이어서 투뽀왕국으로 출가함으로써, 양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주 밀접한 구생(舅甥:외삼촌과 조카)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한장(漢藏) 간의 역사는 한장 차마무역의 관계를 통해 1,000여 년 동안이나 이어진다.

2) 역대(歷代) 한장 차마무역의 발전 과정

당송(唐宋) 이래, 중국이 방대한 다민족으로 형성되어 온 국가라는 점에서 볼 때, 차마무역(茶馬貿易)은 한・장 관계의 발생과 발전의 오랜 세월동안 매우 일관성 있게 진행되어 온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소위 ‘한장 차마무역’이란 바로 티베트인들이 말(馬)이나 기타의 토산품을 이용하여 중국 내지(內地)에서 생산되는 차(茶)를 교환해 간 일종의 ‘물물교역(物物交易)’형식의 경제활동이었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후에, 중국 서북지역 도시경제의 번영과 한·장 간 정치, 경제 및 문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다민족인 중국이 민족 단합 차원에서도 한・장(漢藏) 간의 우호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유대 작용까지도 하였다.

당대(唐代)로부터 시작한 한장 차마무역은 송대(宋代)의 중흥기(中興期)를 거쳐, 명대(明代)에 이르러서 갑자기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당대(唐代)에 티베트 고원에서 발흥한 투뽀(吐蕃)왕국은, 당나라와 호시(互市)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개원(開元) 연간(年間)의 기록에 의하면 주로 츠링(赤岭) 일대에서 호시가 많이 이루어졌다.5) 그러나 이때의 한장 차마무역은 아직 초기 단계로서 국가적으로도 정착된 제도가 없었으며, 그 교역의 품목 또한 차마(茶馬)에 국한된 것이 아닌 종합무역의 형태였다.

당대(唐代) 이래, 중국은 군마(軍馬)의 중요성과 그 수요에 대한 인식이 절박해지면서부터 서북 변방민족에 대해 ‘이차역마(以茶易馬:차로써 말을 바꾸다)’의 정책을 일관성 있게 시행하게 된다. 송대(宋代)에서는 티베트와의 접경지역에 차마사(茶馬司)를 건립하고 ‘다법(茶法)’을 제정하여 차(茶) 판매를 국가 전매로 하는 ‘각다법(榷茶法)’6)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송나라의 시급한 군마(軍馬) 문제를 해결해 줌과 동시에 날로 그 세력을 팽창해가는 티베트를 회유하여 서북 변방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수입에 있어서도 한 몫을 하게 된다.

명대(明代)는 역대 한장 차마무역의 최고 전성기로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세밀함을 보였는데, 차발마제도(差發馬制度)의 성립과 금패신부(金牌信符)의 제작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는 당송(唐宋) 때에 있었던 단순한 물물교역 형태와 차마호시(茶馬互市)의 차마사제도(茶馬司制度)가 아닌 부세(賦稅) 제도로서 티베트의 각 부족에게 조공이 아닌 부세의 의무를 떠맡기는 획기적인 제도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명나라는 조공호시(朝貢互市)를 제도화하여 정착시킴으로써 차발마제도 실행에서 오는 티베트 각 부족의 수령과 종교지도자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고 그들을 회유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차발마제도와 조공호시제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구체적으로 서술하겠다.)

이상의 제도적 기틀 아래, 명나라는 차상(茶商)들이 개인적으로 차를 판매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시키는 ‘사차금지(私茶禁止)’의 조치를 내리는가 하면 그 처벌에 있어서도 전대(前代)의 어느 왕조보다 더욱 구체화되고 엄격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중국의 국가기관 즉, 차마사(茶馬司) 등의 정부기구를 통해서만 차(茶)를 수입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이 차(茶)를 미끼로 변방의 소수민족을 회유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권 안에 귀속시켜 변방의 안녕을 도모하고 국방에 필요한 군마(軍馬)를 손쉽게 얻으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 -----
1) ‘한장(漢藏)’은 중국의 한족(漢族)과 시짱(西藏:티베트)를 합하여 간칭(簡稱)한 것임. 한장(漢藏) 차마무역(茶馬貿易)은 중국과 티베트 간에 이루어진 차마무역(茶馬貿易)을 뜻함.
2) 당송대(唐宋代)에는 티베트를 투뽀(吐蕃), 원명대(元明代)에는 우쓰장(烏思藏 혹은 烏斯藏), 청대(淸代) 이후에는 시짱(西藏)이라 稱함.
3) 투뽀어(吐蕃):티베트인들은 자칭‘博巴(뽀어빠)’라고 한다. 즉, ‘뽀어(博)’라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중국 당대 이래 칭하기를 ‘뽀어(蕃)’ 또는 ‘투뽀어(吐蕃)’이라고 한다. ‘번(蕃)’의 고음은 ‘박(博)’이며 중국어로는 뽀어(博, bó)라고 발음한다.
4) 짠푸(贊普): 둔황문헌(敦煌文獻)에 의하면 ‘짠푸(贊普)’의 명칭은 각부(各部)의 수령들이 바친 것으로, 예를 들면 몽고 각 부족의 수령들이 티예무쩐(鐵木眞)에게 징기스칸(청지스칸・成吉思干)이란 명칭을 바친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 티베트에 ‘왕(王)’이란 명칭이 출현하였으나 그 것은 각부 수령을 의미한다. ‘짠푸(贊普)’의 뜻은 ‘번부지대왕(蕃部之大王)’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실 ‘티베트의 황제’란 뜻이며 서기 736년에 라싸(拉薩)의 서쪽에 건립된 ‘은란달찰로공기공비(恩蘭達札路恭紀功碑)’의 정면에 새겨진 비문을 보면 ‘폐하(陛下)’란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한장자서(漢藏字書)’ 중에는 “천자(天子)”의 의미로 해석되어 있다.
5) 츠링(赤岭)은 지금의 칭하이(靑海) 허위안(河源)부근이며, 당나라와 티베트가 국경선을 결정짓고 기념비를 수립한 곳이다. 이곳은 양국 간의 회명(會盟)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후에 한 장 경제교류와 차마호시(茶馬互市)가 주로 이루어졌다. 《신당서(新唐書)》권216 상(上),〈토번전(吐蕃傳)〉,654면(面).
6) 각다법(榷茶法): 차법(茶法)의 일종으로서 송나라 때 국가가 차를 전매하는 법률이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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