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숲에는 두 길이 있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이다. 그런데 엉뚱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왜 그 길을 갔냐고, 그저 사람들이 걸은 자취가 적은 게 이유였냐고, 정말로 풀이 더 많이 덮여 있어서 그 길로 갔냐고 물어본다.

2. 사람이라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있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1)

처음 이 구절을 배웠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가슴 가득 환희가 차올랐다. 심오하고 숭고하고..... 공자는 실로 위대한 인문주의자였고, 유학은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이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중용》에서 말하는 길[道]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본성에 따라 이웃의 아내와 불륜에 빠지는 것도 길인가? 《중용》에선 당연히 아니다. 공자의 표현으로는 무도(無道)한 일이다. 《논어》에 보면 “나라에 도가 없다”, 혹은 “천하에 도가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무도는 사람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법도가 행해지고 있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성경 말씀에도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본성은 본능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도(道)는 행위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본성을 따르는 게 도라 함은 규범에 맞게 행위함을 의미한다. 이때의 본성은 규범을 준수하는 도덕성이다. 칸트로 말하면 지켜야만하기 때문에 지키고, 행하여야만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의지(善意志)이다. 본능을 억제하고 오직 도덕법칙의 명령에만 따르는 것이다. 하늘은 이런 도덕적 본성의 근원이다.

사실 공자가 말하는 하늘은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진다. 혹자는 인격적 주재자라 하고, 누구는 비인격적인 존재라고도 한다. 다만 해석은 비록 다양할지라도, 하늘이 공자 자신의 믿음과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공자로 하여금 상갓집 개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천하를 주유하게 했던 것도, 쓰디쓴 좌절 끝에 귀향을 결심하게 했던 것도 그 판단과 행위가 옳은 것이라는 믿음은 모두 하늘에서 나온다. 공자는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규범은 마치 차선과도 같은 것이다. 차선이 없거나, 있다 해도 사람들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사고는 필연적이다. 이른바 법, 도덕, 관습, 혹은 종교 등과 같은 사회규범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틀이다. 개인이 임의로 바꾸거나 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규범의 선천성과 보편성을 담보하는 게 하늘이다.

유교가 특히 중시했던 사회규범은 도덕이었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어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은 유학자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런 꿈은 실현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 본성을 따르기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말한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가서 구하고 본다고. 아이의 부모로부터 감사의 말을 듣고 싶어서도 아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도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차마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맹자에 의한다면 이런 마음을 다하면 곧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아는 것이 곧 하늘을 아는 것이다. 2)

여기까지 오면 굳이 가르침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각자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면 누구라도 성인이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유교처럼 교화(敎化)를 강조하는 사상도 없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단서이고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단서이다. 3)

맹자의 말 중에서도 매우 과격하다. 이 말대라면 인의예지를 실행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란 얘기인데....... 덕분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맞아 죽었다.

순자(荀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강제적인 통제를 정당화한다. 순자에 의한다면 굽은 나무를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 불에 달구고 힘을 다해 휘듯이, 인위적인 노력을 가하여야만 인간은 선해질 수 있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교육이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이유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반듯한 길을 옆길로 새지 않고 똑바로 가게끔 인도하는 일은 유교적 질서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바탕인 것이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가 제시한 길은 도덕적 이상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오래 존재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걸어야만 하는 이 길은, 결코 금수일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해주는 길이다.

3. 길이란 다니다보면 만들어진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대청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대청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던 윤편(輪扁)이 환공에게 물었다.

윤편 : 감히 묻겠사옵니다. 지금 읽고 계신 것은 무엇이옵니까?
환공 : 성인의 말씀이니라.
윤편 :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시옵니까?
환공 : 이미 돌아가셨다.
윤편 :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로군요.
환공 :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만약 너의 말이 그럴듯하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넌 죽을 줄 알아라.
윤편 : 신의 일을 통해 본다면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느슨해져서 견고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해져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 일은 손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응할 뿐,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이에 있는 기술은 신이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도 없고, 자식은 신에게서 전수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칠십 늙은이가 되도록 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4)

환공은 옛 성인들이 이미 닦아 놓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 길은 분명 훌륭하고 위대한 길이지만 그게 환공이 진정으로 원한 자신의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윤편의 말처럼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를 금과옥조마냥 받드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윤편이 지독히 어리석은 늙은이인지도 모른다. 평생의 기술을 자식에게조차도 전해주지 못하는 어리석은 늙은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야한다는 것. 네 몸과 마음으로 살면서 얻는 것이 진짜 너의 인생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장자(莊子)가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초(楚)나라 왕이 사신 두 명을 보내어 장자를 초빙하는 뜻을 전했다. 장자는 낚싯대를 잡고 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내가 들으니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가 있는데, 죽은 지 3천년이나 되었다지요. 왕께서는 그 거북을 비단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에 모셔 놓았다는데........ 그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귀한 대우를 받길 원할까요? 아니며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원할까요? 돌아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고자 하오.” 5)

윤편의 찌꺼기 이야기나 3천년 묵은 거북껍질 이야기나 맥락은 같다. 이른바 명교(名敎)니 예법(禮法)이니 하는 유교의 도는 모두 오래된 찌꺼기나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길은 헛된 존엄와 거짓된 명예로 포장된 채, 박제된 거북처럼 생명을 고갈시킨다. 영화 《다크나이트》 의 엔딩 신에서 배트맨은 말한다.

때로는 진실만으로는 부족하오. 때로 사람들은 그 이상을 가져야만 하오. 때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에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오.

▲ 영화 《다크나이트》 포스터. 고담시의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 그는 본래 선과 악이 공존하는 투페이스였다.
고담시의 질서를 위해 하비 덴트의 추악한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로 바뀐다. 악이 선을 이기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영웅이 만들어진다. 정의(正義)를 위해, 선(善)의 이름으로 기꺼이 생명을 바친 위대한 영웅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런 영웅을 기리며, 사람들은 정의와 선으로 포장된 길을 씩씩하게 걷는다. 거짓은 은폐되고 진실은 왜곡된 그 길을 의기양양하게 걷는다.

지배이념은 곧고 큰 길을 제시한다. 누구라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고, 반드시 걸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 길은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성인이나 선각자가 이미 열어 놓았으니 당신은 다만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 쉬운 탄탄대로를 버리고 샛길로 빠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위험하다고 한다. 금수로 전락하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굳이 가지 말라는 길을 가곤 한다. 남들이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와 말한다. 내가 가지 말라는 길을 가보았더니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아니 오히려 이제껏 알고 있던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더라고. 이제껏 가야만 한다고 배운 그 길은 실은 참된 길도 아니요, 나를 노예로 만드는 길이었노라고 말해준다.

이런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혀에는 못이 박혀진 채 죽었다. 민주주의가 좋은 건 잡풀이 우거진 숲길을 가더라도 입에 재갈을 물리고 죽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만스런 짓을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다만 더욱 교묘하고 훨씬 은밀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지배하는 줄도 모르게 지배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통제한다. 어쩌면 현대인은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벌레 하나씩을 모두 뱃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그게 내 안에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스스로 주인이라 여기며 살지만 실상은 노예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장자는 말한다.

길이란 걷다보면 생기는 것이다. 6)

길은 본래부터 있던 게 아니다. 한 사람 걷고 두 사람 걷다보니 길이 생긴다. 이 길은 없는 길이다. 걸으면 생기고 걷지 않으면 사라진다. 좋지 않은가. 조금 불편하고, 좀 더 돌아간들 어떤가. 마음 내키는 대로 걷다보면 어딘가에 도달할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또 어떤가. 걷는 동안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탄탄대로를 남들보다 빨리 가야만 좋은 건 아니다. 조금 가난해도, 아니 많이 부족해도 내 삶을 내가 사는 길이다.

주) -----
1) 《중용》
2) 《맹자》, 〈진심 상(盡心上)〉
3) 위의 책, 〈공손추 상(公孫丑上)〉
4) 《장자》, 〈천도(天道)〉
5) 위의 책, 〈추수(秋水)〉
6) 위의 책, 〈제물론(齊物論)〉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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