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집》은 1931년에 한암(漢巖) 중원(重遠)이 편집하여 필사한 한암필사본과 1943년에 선학원(禪學院)이 편찬한 선학원본 두 본(本)이 있다. 선학원본에는 한암필사본보다 98수 가량의 시가 더 실려 있는데, 이 시들의 대다수는 경허가 북방에서 지은 것들이라 한다. 그리고 한암필사본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대개 선사로서의 경허의 사상과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 있어 한 눈에 보아도 경허의 작품임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선학원본에는 속인들의 작품과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만해가 쓴 선학원본의 서문에서 북방에서 경허의 유문(遺文)을 수습한 정황을 알 수 있다.

나도 이 책이 속히 세상에 간행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그 후 그 문도와 뜻이 있는 이들이 “경허가 지은 글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직도 만년에 자취를 감추고 살던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여 기어코 완벽하게 유문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간행하자던 논의가 일시 중지되었다. 올봄부터 후학 김영운(金靈雲), 윤등암(尹燈岩) 등이 이 일을 위해 발분하고 나서서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로 직접 가서 샅샅이 조사하여 거의 빠짐없이 수습하였다. 내가 다시 원고를 수정(修正)하였으나 연대의 선후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수집하는 대로 편찬하였다.

경허가 입적한 지 31년 뒤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을 보내어 경허가 살던 갑산, 강계, 만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서 경허의 유고를 재차 수습한 것이다.

경허의 시문은 일필휘지로 단숨에 써 내려가고 수사를 위해 언어를 조탁하거나 안배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흉중에서 곧바로 유출하는, 그야말로 선객(禪客)의 시라 할 수 있다. 원래 율시(律詩)는 3,4句와 5,6구에 대우(對偶)를 맞추는데, 이 때 서로 조응(照應)하는 고사를 적절히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경허의 시는 율시에 어려운 고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문으로 문장을 지었지만, 경허가 주로 읽은 글은 불전(佛典)이라 그의 시문은 일반 선비나 문사들의 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경허는 한암에게 자신이 중노릇하기 싫어서 《장자(莊子)》를 천독(千讀)했다고 술회했다고 하거니와 경허의 시문(詩文)을 보면 그의 독서 편력이 주로 불전과 《장자》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검토한 바에 의하면, 현행 선학원본 《경허집》과 《경허법어》에는 경허의 시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이 많다. 경허의 작품이 아닌 것이 실려 있다면 이는 경허의 선사(禪師)로서의 위상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니다.

잠영이 늘 꿈속에 들어와 놀라노니 簪纓每入夢中驚
만년에야 잘못 깨닫고 곡구에 은거하였지 晩悟當年谷口耕
심신은 이미 청산의 무거움을 배웠고 心身已學靑山重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백발이 흩날리누나 歲月偏欺白髮輕
흉년 걱정에 쌀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念荒玉食呑難下
나라 근심에 등나무 평상에 누워도 편치 않네 憂國藤床臥未平
노년이라 감개한 심정이 많으니 衰境云云多感慨
등잔 아래서 하염없이 마주하노라 悠然相對一燈明 1)

잠영(簪纓)은 비녀와 갓끈으로 벼슬아차가 입는 관복(官服)을 뜻하는 말이다. 경허의 작품이 아니거나 누각이나 정자에 걸린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한 것이라 생각된다. ‘곡구(谷口)’는 서한(西漢) 때 정박(鄭璞)이 조정에서 아무리 불러도 벼슬하지 않고 곡구란 곳에서 은거하였던 데서 온 말로 은거하는 곳을 뜻한다. 내용으로 보아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물러난 사람이 지은 시로 판단된다.

앉아 있음에 작은 창 있은들 어떠리 打坐何妨有小窓
맑고 시원한 강물 소리 듣는 것도 기뻐라 淸泠也喜聽春江
술 한 병 놓고 마주하니 청산은 만겹이요 一樽相對靑山萬
천리 먼 길 돌아오니 한 쌍의 백발 노인일세 千里歸來白髮雙
술에 병들어 근래 나랏일 잊으려 했더니 病酒伊來將忘國
신선 찾아온 이곳에서 다시 고을 다스리네 訪仙是處更爲邦
서늘한 대자리 담백한 나물 위안이 되니 淸簞淡蔬堪足慰
서울에 살 때 생각을 잊고 싶어라 欲忘京洛舊心腔

신선을 찾는다는 ‘방선(訪仙)’은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란 사람이 신선술을 좋아하여 조정의 부름을 고사(固辭)하고, 교지(交趾)에 선약(仙藥)의 재료인 단사(丹砂)가 난다는 말을 듣고는 자청하여 구루령(句漏令)으로 부임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고을을 다스린다는 ‘위방(爲邦)’과 조응할 수 있다. 즉 신선이 있음직한 깊은 산골에 왔건만 여전히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맹주(孟州)에 원님으로 부임하여 지은 <초도맹주(初到孟州)>에 “치천이 인끈을 차고 흰 구름 가에 갔으니, 손으로 단사 캐고 신선을 찾으려 한 게지[雉川腰綬白雲邊 手採丹砂欲訪仙]” 하였다. 치천은 갈홍(葛洪)의 자이다. 그리고 ‘서울에 살 때 생각을 잊고 싶어라’라고 했는데, 경허는 출가하기 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 산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시는 삼수・갑산 또는 그 인근 지역에 좌천되어 온 고을 원님이 지은 시일 가능성이 크다.

연하가 깊은 곳에 솔숲이 서늘하니 煙霞深處萬松寒
땅에 가득한 맑은 빛 자세히 보노라 匝地淸光仔細看
부귀는 구름 같은 것 바라는 바 아니니 富貴如雲非所願
세상 잊고 초야에 사는 게 무에 어려우랴 漁樵忘世有何難
집 생각에 가을 들어 흰 머리털 부쩍 늘었고 懷家雙鬢秋增白
나라 걱정에 마음의 충정은 늙을수록 더해라 憂國寸心老益丹
신선술을 배우려 떠나고 싶지만 欲學仙方隨學去
임금님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 念言君父太無端 2)

“부귀는 구름 같은 것 바라는 바 아니니, 세상 잊고 초야에 사는 게 무에 어려우랴”라 하였고, “신선술을 배우려 떠나고 싶지만 임금님 생각하니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 하였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도성을 떠나 초야에 은거하고 싶지만 임금을 생각하면 충정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벼슬아치가 지은 시로 보아야 한다. ‘欲學仙方隨學去’의 ‘隨’ 자는 ‘遂’의 誤字로 판단된다.

소리 없는 하늘에 감히 호소하노니 天載無聲敢訴言
오운 떠 있는 어느 곳에서 용헌에 절할거나 五雲何處打龍軒
설날에도 타향에 있는 몸 스스로 가련하지만 自憐元日他鄕客
오랑캐 산골 예의 좋아하는 마을이라 다행일세 也幸夷山好禮村
연초에 햇살이 퍼지니 정양하기에 좋고 首祚布陽宜養素
역질 물리치느라 도소주를 남김없이 기울인다 屠蘇治疫罄無痕
아이들은 나라의 한을 알지 못하고서 牧童不識邦家恨
거리에서 떠들썩하게 피리와 북 울리네 簫鼓杵謠響里門 3)

‘五雲何處打龍軒’의 ‘打’ 자는 ‘拜’ 자의 오자임이 분명하다. 이 시는 한암필사본에도 실려 있는데, 역시 ‘打’ 자로 되어 있다. 초서로 쓰면 비슷하기 때문에 탈초를 잘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운(五雲)은 오색구름으로 임금이 있는 곳을 뜻한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제위에 오르기 전에도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고 오색구름이 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용헌(龍軒)’은 임금이 타는 수레, 즉 어가(御駕)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리 없는 하늘에 감히 호소하노니, 오운 떠 있는 어느 곳에서 용헌에 절할거나.”라 한 것을 보면, 전란이 일어나 어가가 몽진했을 때 임금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 찾아가 배알할 수 없음을 한탄한 시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일대에 피난해 있던 벼슬아치가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이 경허의 유고들 중에는 경허가 읽어보고 베껴놓은 시들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선학원본과 《경허법어》에는 경허의 작품이 아닌 것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속인의 작품들을 입전수수(立廛垂手)의 경계를 표현한 것으로 경강부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입전수수로 해석한다면 입전수수 아닌 게 어디 있으랴.

그리고 <운파의 별장을 찾아서[訪雲坡林庄]>에는 “운파(雲坡)는 기생 이름이다.”, <일해정사에서 술을 마시며[一海精舍小酌]>에는 “일해(一海)는 김박언(金泊彦)의 호이다.”, <북문 밖을 나와 박상사(朴上舍)를 방문하다[出北門外訪朴上舍]>에는 “포산(苞山), 소산(小山), 매은(梅隱)이 함께 모였다.”라는 주(注)가 달려 있는데,4) 이렇게 자기 작품에 주를 다는 것은 후일 문집으로 간행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 경허는 자신의 종적은 물론 이름까지 감추고자 했다. 일체를 몽환으로 보는 경허가 자신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염두에 두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경허집》을 간행할 때 만해가 주를 첨가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시에서 운파가 기생임을 굳이 밝힐 까닭은 없다고 생각된다.

한암은 <상당(上堂)>이란 제하(題下)의 “산은 은은하고 물은 잔잔하며 꽃은 활짝 피고 새는 지저귄다. 도인의 활계는 단지 이와 같을 뿐이니, 무엇하러 구구하게 세정을 따르리오.[山隱隱水潺潺 花灼灼鳥喃喃 道人活計只如此 何用區區順世情]”에 “이 한 수는 《청허집(淸虛集)》 중에 있다.”는 주를 달아서 이 시가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작품임을 밝혀 놓았다.5) 이는 아마 경허가 상당법문에서 청허의 시를 인용한 것을 제자가 경허의 시로 오인하여 문집에 실었던 것일 터이다.

주) -----
1) 이 시는 원래 선학원본 《경허집》 44쪽에 <상원암여하천서구(上院庵與荷川敍舊)>란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경허법어》에는 410쪽에 <일등(一燈)>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경허법어》에는 이와 같이 임의로 제목을 바꾼 것이 많다.
2) <여박리순서회(與朴利淳書懷)>, 선학원본 《경허집》 41쪽.
3) <元旦>, 한암필사본 《경허집》(오대산 월정사 2009), 135쪽, 선학원본 《경허집》(중앙선원 1943), 39쪽.
4) 선학원본 《경허집》(중앙선원, 1943), 47쪽.
5) 한암필사본 《경허집》(오대산 월정사 2009), 147쪽.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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