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華嚴經, Mahāvaipulya Buddhāvataṃsaka Sūtra)》 또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초기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이다.1) 《화엄경》은 고타마 붓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그 깨달음의 경지(境地)를 그대로 설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그렇게 믿어져 왔다. 물론 이는 역사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다. 그렇기는 하나 《화엄경》은 매우 웅대한 희곡적 구상(戱曲的 構想)과 유려한 서술로 법계(法界), 즉 깨달음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대승경전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이라고 하는 경명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인 것이다. 우리는 갖추어진 경명을 통하여 《화엄경》이 대방광불(大方廣佛)이라고 하는 부처님에 대해서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엄경》과 함께 대승경전의 대표적 경전인 《법화경》이 법(法)을 설하는 경전임을 경명이 나타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흔히 《법화경》을 법을 설하는 경이고 《화엄경》은 부처를 설하는 경이라고 짝을 지어서 말하기도 한다.

부처란 법을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여기에는 법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은 법에 의지하는, 사람과 법의 일체가 있다. 《화엄경》에서는 법을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이러한 부처님으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등장한다. 그래서 비로자나 부처님을 《화엄경》의 교주라고 부르며 《화엄경》을 주석(注釋)하는 이들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삼세간(三世間)에 원융(圓融)하고 십신(十身)을 구족(具足)한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이같이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망라해서 깨달음과 거리가 먼 중생까지를 불신(佛身)에 포함시킨 생각은 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화엄종의 교의(敎義)에서 나온 것이다. 화엄종의 가르침에는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非情)이 동시에 성도(成道)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화엄종의 깨달음에는 중생이 존재할 수가 없다. 본래성불(本來成佛)로서 모든 것은 다 동격(同格)의 부처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를 여기서 볼 수가 있다.

《화엄경》은 원래 석가가 최고의 깨달음을 얻고 난 뒤 그 상태를 특정한 설법 대상을 의식하지 않은 채 스스로 음미하고 있는 내용이다. 화엄사상에는 두 개의 큰 줄기가 있다. 하나는 당시까지 발전해 온 다양한 갈래의 불교사상을 종합하여 중국적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것과, 다른 하나는 《화엄경》에 내재한 사상을 중국적 사유로 재구성한 측면이다.2)

화엄종(華嚴宗)이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는 불교교학의 한 종파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 성립되었으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교학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초조(初祖)는 당나라 두순(杜順, 557~640)으로 종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였고,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은 중국에 새로 전해진 현장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해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인 지론종(地論宗)의 학설을 발전시켰다. 제3조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 643~712)은 화엄종 철학을 집대성하였다. 이 현수의 이름을 따 화엄종을 ‘현수종’이라고도 한다. 그 뒤를 이어 징관(澄觀, 제4조)·종밀(宗密, 제5조)이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禪宗)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이들 5명을 가리켜 화엄 5조라고 하며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와 함께 화엄 7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신라의 자장(慈藏)·의상(義湘) 등에 의해 《화엄경》이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의상에 의해 체계적인 화엄교학이 이루어져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의상은 뒷날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즉 신라 화엄종의 시조라 불렸는데, 저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그의 화엄관과 사상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저서로 이후 화엄학자들의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도 《화엄경》은 많은 승려·불교학자 등에 의해 연구·강론되고 있으며 한국 불교사상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의상(義湘, 625~702)은 속성은 김씨, 법명은 의상(義湘),3) 아버지는 김한신(金韓信)이다. 19세를 전후한 시기에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였다.4)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5)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開祖)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하였으며, 중국화엄종의 제3조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귀국한 뒤까지 이어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뒤 676년(문무왕 16)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편력하였다. 그가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이 아성(亞聖)으로 불렸으며,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도 뛰어난 제자들이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 간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그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고, 표훈의 《오관석(五觀釋)》과 진정의 《삼문석(三門釋)》은 그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를 배우고 지은 것이다.

그는 강의와 수행에 전력했으며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실행하여 수건을 쓰지 않았고 의복·병(甁)·발우 세 가지만 지녔다. 문무왕이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문무왕이 성곽을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의 정교(政敎)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글을 올려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의상(義相)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주인의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의상은 의연하게 대하였다. 선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공부를 마친 의상은 그 신도의 집에 들러 인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미리 준비한 법복과 여러 가지 용품을 함에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의상이 탄 배는 벌써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웠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676년(문무왕 16)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산적이 들끓는 곳이라 하여 만류했으나 의상은 직접 산적들을 만나 선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절을 짓게 해 달라고 하였다. 산적들은 화가 나서 의상을 죽이려 하였다.

이때 갑자기 선묘용이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이에 놀란 산적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짓고 봉황이 나타났다 해서 산 이름을 봉황산이라 불렀다.

부석은 부석사무량수전 서쪽 암벽 밑에 있으며, 선묘용은 주불 아래 있는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 1967년 5월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설화를 뒷받침하는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굴한 바 있다.

주) -----
1) 《화엄경(華嚴經)》은 7처 8회 34품(七處八會三四品)으로 되어 있는데 7처 8회는 설법의 장소와 회좌(會座)의 수효이다.
2) 이효결 외, 《중국철학개론》(한국방송대 출판부, 1998), p.136.
3) 의상(義相)이라고 표시되기도 한다.
4) 《삼국유사》에는 29세에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5) 김두진, 《義湘》(민음사, 1995), pp.49~114. 이하 의상의 생평은 이 책을 참고.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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