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의 본질

▲ 정병국 교수.
종교미술은 일반미술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상의 사실, 실화, 인물 등을 제재(題材)로 한 미술은 일반적으로 성작(聖作)이라고 부르며 서구에서는 성화상학(聖畵像學, Ikonographie)으로 학문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어느 종교이건 성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불교미술을 불교성작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불교조상(造像)이라 해야 옳다.

일반미술과 달리 사상적 의미를 갖는 불교조상은 어떻게 시작됐으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특히 신(神)들을 부정한 석가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불교미술의 유래와 본질은 무엇인가?

불교미술은 처음부터 미술적 가치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의 진리주장을 지극한 신앙심의 발로에 의하여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미술사적 문화사적 차원에서만 이야기하면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종교미술의 목적인 종교적 조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불교미술을 단순히 불교미술사적 문화재로서 인식해서는 안 된다.

불교미술은 과연 불교의 어디쯤에서 발아하게 된 것인가. 본래 근본불교에 있어서 석가는 신앙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누구를 신앙한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밝혀지고 죄를 멸하고 정화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서양의 이른바 종교가 및 종교철학자들은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할 때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든가 하는 관념 및 제불(諸佛) 제천(諸天)의 조상(造像)을 내세워 그것이 마치 신앙의 대상인양 인식을 그릇되게 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불교의 유물·유적’곧 성보(聖寶)들을 불교문화재로 일괄해서 이름을 붙여 마치 불교미술이 지난 과거 시대의 퇴적물적 집적체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것이 어느 집단이나 어떤 개인의 관념의 것이 아닌 것으로서 불교의 진리 주장인 사상성을 담고 흙과 바람 속에 머물러 우리 개개인의 가슴을 출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미술을 이해하려면 ‘문화재’ 차원이나 ‘예술작품’의 감상차원에 앞서 우선 이와 같은 불교적 사상성과 교리에 대한 기초지식 없이는 처음부터 인식적 정서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 조형예술의 꽃으로 불리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 석가 본존의 입술에 붉은 주사 빛깔이 보인다. 또 인도의 온갖 유구 유품 가운데 붕괴되다 못한 흔적 한쪽에서도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채색 장엄이 완연하다. 석불, 조상, 조각 등을 장엄하고 장식한 빛이 분명함에 비추어보면 석가의 근본교리와 불교미술 사이의 괴리를 생각할 때 그 아름다움의 가치는 단순히 참의 가치에 육박하기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한다.

즉 출가자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을 찬탄할 겨를을 가지면 못쓴다는 것이다. 석가의 본 뜻대로 한다면 어떠한 형상과 색이 모양을 지니고 풍부한 색채를 띠고 있으면 세속이 아닌 출세간 거기에는 없어야 한다. 하물며 우아하고 화려한 것들은 근본불교에 있어서 부정관(不淨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가의 말씀대로라면 인간 본유의 장엄에의 거센 충동과 재가 불교도들의 신앙숭배에의 열정으로 인하여 이른바 불교미술은 불가불 발아(發我)하여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교조상의 본래적 주제는 어디까지나 석가의 불전담(佛傳談), 곧 석가의 일대기를 기록적으로 조상한데서 시작한다. 흔히 오늘날 사원에 팔상전, 영산전 등은 모두가 불전담의 변상(變相)들이다.

벌써 석가 조상의 출현 이전에 석가 생애의 사적지가 신성시하게 되어 탄생, 성도, 전법륜, 열반을 이룬 곳 즉, 4대 성지 등의 장엄 및 승가의 거주지인 사원마저 장엄화 되어 발전돼 왔었다.

불교미술의 본질은 끝내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는 석가의 본지를 그르친 중생(衆生)들의 신앙심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미술을 통한 불타의 세계

불교미술은 불교적 사상을 갖춘 국가, 문화, 사상, 풍토 등의 환경적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여 왔는데 불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건축〔佛殿〕, 불교조각〔佛像〕, 불교회화〔佛畵〕, 불교의식·공양구〔佛具〕 등으로 표출되어져 사찰을 구심적으로 예배, 신앙 되는 성보(聖寶)적 가치를 갖추면서 예술적 조형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성보의 조성에 지극한 신심과 예술 혼을 발휘하는 이가 바로 불교미술 작가〔佛母〕이며 이들이 조성한 불교조형과 시각적 장엄들을 재가 신도들로 하여금 환희심(歡喜心)을 자아내어 성스러운 불조상과 장엄의 꽃비를 내리게 한다.

과거의 불모들은 전통을 바탕으로 지극한 신심을 앞세워 목숨을 불사한 위대한 불교 조형물을 건립·조성하였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의 돈황 석굴, 태국의 황금사원, 한국의 석굴암, 팔만대장경 목판 등 세계 각국에서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불멸의 불교미술을 후대인에게 물려주고 있다.

그렇듯 불사(佛事)를 담당하는 불교미술 작가들은 지대한 업적과 불교조형 예술품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시각디자인과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많은 발전을 하고 있지만 현대 불교미술은 혼란스러우면서도 매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서구문물이 팽배하고 사상성과 민족성이 사라지며 물질 만능시대에 접목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정신적 문화적 개념이 무너질 위기 속에 불교의 절대성과 신앙심이 돈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교미술은 전통적인 정신적 뿌리와 현대적인 감각의 시대성 요구에 부응하면서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적 감각으로 디자인, 매스미디어, 인터넷, 설치미술, 포퍼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전개하여 발전하고 있다.
현대 불교미술의 과제는 전통불교미술과 현대불교미술의 이원화이다.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을 계승하는 문제와 이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재료와 기법 및 다양한 장르가 요구되는 창작적인 작품성을 추구하는 문제이다.

불교미술의 전통적 양식과 기법은 인내와 지극한 신심이 요구된다. 절제된 규범으로 인하여 작가들로 하여금 창작 의지를 꺽어 버리기 때문이다.

곧 지극한 신심으로만 제작하여 부처님의 본질적 형상에 조형미를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므로 신앙적으로 불상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이만이 그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본질의 불교사상을 존상화 시켜 나타난 불상(佛像)을 의미한다.

한편 오늘날 새로운 재료와 시각적 다양한 장르의 미술표현은 그 폭이 광범위하다.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조명, 색채, 디자인, 광고, 매스미디어, 인터넷, 설치, 포퍼먼스 등 각색각양의 시각디자인이 이 시대의 불교미술을 대변하는 시대가 도래되어 불교의 교리와 교법을 포교, 교육, 수행을 장엄하는 도구로 변하고 있다.

즉 불교조형의 이미지화, 디자인화해 불교미술을 통한 불교의 중생제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성보로서의 보존적 가치도 매우 중요한데 즉, 우리의 불교미술·불교문화재인 것이다.

불전, 불탑, 경판, 불상, 불화, 불교 의식구·공양구 등이 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면서도 성보이며 바로 불교미술이 아닌가!

불모들의 예술혼으로 조성된 불교미술은 부처님이자 불성(佛性)의 결정체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미술이란 불교의 교리·교법의 영역에서 의궤(儀軌)를 바탕으로 하여 조형적 형상으로 표출되어진 신앙적 매개체이다.

정병국 |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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