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에 베트남 남부를 다녀왔습니다. 월남전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호치민은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가 내지르는 굉음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호치민을 벗어나면 끝없이 펼쳐지는 열대지방의 들판은 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 그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는 소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월남전의 상처는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영화 가운데 가장 잘 만든 영화를 꼽는다면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그리고 <풀 메탈 자켓>일 것입니다. 그러나 <풀 메탈 자켓>(미국, 1987)은 앞의 두 영화에 비해 덜 알려진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영 금지되었다가 16년 후 개봉됐지만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스탠리큐브릭 감독의 작품으로 전쟁의 아이러니와 인간성 파괴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평범한 청년들이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군인이 된 병사들이 베트남전쟁에 투입돼 전쟁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 해병대에 입대하기 위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던 청년은 다 비슷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소년티를 갓 벗은 청년들의 모습은 약간 슬퍼 보이기도 하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는 등의 차이점은 있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사회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든 이들은 아직까지는 말랑말랑한 정신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해병대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 하트만 훈련교관(R. 리 이메이)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하트만 상사를 연기한 배우의 연기는 매우 리얼했습니다. 요즘 MBC에서 방송하는 예능 <진짜 사나이>에 나오는 빨간 모자를 쓴 악마조교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훈련병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모습은 거의 흡사했지만 하트만 상사는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인신모독을 한다는 점에서는 더 가혹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교육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일까요?

하트만 상사는 훈련병들이 인간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인간이라면 감정이나 도덕, 이성 등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특성은 전쟁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하트만 상사는 훈련병들에게서 이런 인간의 고유 특성을 말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총알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을 전쟁기계로 바꾸는 것이 그의 목표인 것이지요.

그의 교육방식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폭언과 폭력 등 인격모독을 통해 훈련병들에게서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돼지 같다, 넌 인간쓰레기다, 너희 부모도 너처럼 돼지고 인간쓰레기냐, 이런 식으로 말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분노감이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병사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였습니다. 그는 매사 굼뜨고 둔해서 훈련을 제대로 못 따라갔습니다. 철봉에 매달리는 훈련도, 장애물 넘기도, 군가를 부르며 하는 구보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해서 그는 하트만 상사의 독설과 폭력을 혼자 독차지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파일 병사는 언제나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맑은 표정 때문에 하트만 상사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 같은 순한 표정을 보며 하트만 상사는 3초 안에 그 웃음을 멈추라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고 대답했고 그래서 하트만 상사에게 목이 졸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순수하고 행복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밝았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풋 락커에 도넛 빵을 숨겨두었다가 들켜 다른 훈련병들이 대신 벌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파일 병사 때문에 귀찮은 일이 많았는데 이렇게 벌까지 대신 받게 되자 다른 훈련병들은 파일 병사를 눈엣 가시처럼 여겼고, 그래서 한밤중에 집단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의 구타사건 후 파일 병사는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트만 상사가 애초에 세웠던 목표에 맞는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훈련에서 더 이상 뒤처지지 않았고, 쓸데없이 웃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름 바람직한 변화로 받아들여질 법 했습니다.

그런데 파일 이등병은 8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자대배치 받는 날 사고를 쳤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화장실에 앉아서 총을 만지작거리며 총과 대화를 나누는 등 이상 행동을 보였는데 그의 표정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눈빛은 풀려있고, 입가에 이상한 미소가 흐르고, 그를 말리기 위해 하트만 상사가 왔는데 그 순간 상사를 향해 총알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한 방 쏘았습니다.

둔하지만 순수했던 파일 병사는 어느 순간 훈련의 목표였던 살인병기가 돼 있었습니다. 감정은 잃고 총만으로 존재하는 그런 인간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신병 훈련소 하트만 상사의 혹독한 훈련은 순수하고 착했던 한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그에게서 행복을 앗아갔고, 분노와 살의만 남아있는, 그러면서 통제도 안 되는 그런 인간으로 바뀌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훈련기간이 끝나고 자대배치 받아 헬기를 타고 베트남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 어떤 병사는 베트남의 일반 사람들을 향해 무작위로 총을 쏘았습니다. 왜 적군이 아닌 어린 아이와 여자에게 총을 쏘느냐고 했을 때 그의 대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자는 느리기 때문에 총 쏘기가 더 쉬워서라고. 이들 또한 살인게임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영화 제목 ‘풀 메탈 자켓’의 의미는, 간단히 말하면 탄피고, 좀 더 정확한 뜻은 자동화기용으로 만든 탄환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무정물인 탄환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인간성 파괴를 다루면서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전반부가 훈련소에서의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성의 파괴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다루었습니다. 전반부에서 훈련 교관에게 존 웨인 같다고 하면서 나름 용기와 비판의식을 보여주었던 ‘조커’라는 별명의 병사는 베트남전쟁의 모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가슴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배지를 달고 있지만 ‘죽이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구가 적힌 철모를 쓰고 다녔습니다. 상사가 이 둘 사이에 아이러니가 있다고 지적하자 이것이 칼 융이 말한 인간의 이중적 본성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영화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준 모순을 베트남전쟁의 실상으로 해석했습니다.

명색이 전쟁영화기에 전투신이 빠질 수 없는데, 유일한 전투신인 시가전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감독은 월남전에 참전한 미국을 비판했습니다. 시가전에서 몇 안 되는 남겨진 병사로는 무리라고 판단해 상관은 후퇴하려고 했지만 무모한 한 병사가 적이 있을 것 같은 건물로 뛰어들었기에 본의 아니게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 싸움으로 아군은 많은 부상을 입고 사상자도 났지만 결국 적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타난 적은 어린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맞서 싸운 대상이 너무나 연약해 보이는 여학생이라는 사실에 아연 질색했지만 그들은 이 여학생을 결국 죽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과 아이러니를 설명한 설정이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온 힘을 다해 싸웠던 베트남이라는 나라와의 전쟁은 장정 10여 명과 맞서는 한 여학생의 싸움처럼 공정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그래서 이 전쟁은 많은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이 영화 <풀 메탈 자켓>도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 내 비판의식에 편승한 영화였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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