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남 탓’으로 돌리고 다른 이의 잘못에 대해선 엄하게 문책하려는 경향이 짙다. 엄벌백계(嚴罰百戒)는 죄(罪)를 엄히 물어 다른 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 뜻이 있으나 그 실효성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불교에선 치죄(治罪)보다 사전에 범죄를 일으키지 않도록 도모하는 것을 중시한다. 다음은 4·13 총선을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은 위정자(爲政者)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아함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형벌을 통해 범죄를 막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농사와 가축 기르기에 열심인 자에게는 씨앗과 사료를 지급하여야 하고, 상업에 열심인 자에게는 자금을 지급하고 관직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는 생활에 합당한 봉급을 지급하여야 한다.”

부처님은 공동체 사회를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엄벌 형태를 지양하셨다. ‘형벌을 통해 범죄를 막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시는 이유는 형벌이 범죄를 막는데 주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대목이다. 이어 농축업자에겐 씨앗과 사료를, 사업하는 이에겐 자금을 지급하라는 말씀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기반을 만들어 줘야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떠한 흉악범이라 할지언정 적극적인 자비를 베풀기를 주문하셨다. 그것이 바로 용서다. 용서는 분노와 원망을 잠재운다.

물론 용서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게 일반 사람들의 행태다. 그래서 옛말에 이르길 “아무리 어리석을지라도 남을 책망하는 데는 밝고, 아무리 총명할지라도 자기를 용서하는 데는 어둡다[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고 했다.

《법구경》에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 이러한 생각을 품은 이에겐 원한이 가라앉지 않으리라.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이에겐, 원한이 가라앉으리라.”했다. 용서가 이루어질 때 원한이 가라앉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우리 사회의 상생과 평화의 시작은 용서에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법진 스님 | 본지 발행인·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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