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루노,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불에 태워지다

▲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1899년 빅토르 위고, 헨리크 입센, 바쿠닌 등의 지식인들이 그가 화형 당한 로마의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에는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는 글이 새겨졌다.
진리는 어려워서 알기 어려운 게 아니다. 진리는 어쩌면 매우 알기 쉽고 아주 간단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개 진리는 은폐되고 왜곡된다.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해, 아니면 확신에 따라서 진리는 은폐되고 사실은 왜곡된다. 때론 신(神)의 이름으로, 때론 선(善)의 이름으로……. 어쩌면 문명은 왜곡된 지식이 진리로 둔갑하고, 거짓된 믿음이 사실 위에 군림할 때 비로소 개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1600년. 로마의 캄포 데이 피오리(Campo dei Fiori) 광장에 한 사나이가 끌려 나왔다. 사내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고, 재갈 안에는 턱밑으로부터 쇠꼬챙이가 혀를 관통하여 꽂혀 있었다.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온갖 모욕을 가하여졌고, 마침내 발가벗겨진 채 불에 태워졌다. 이 남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그렇게 죽었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떤 것이었길래, 얼마나 무서웠길래, 아니면 얼마나 미웠길래, 그토록 잔인하게 입을 봉쇄하며 죽여야 했을까?

브루노는 1548년 나폴리 왕국의 놀라(Nola)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세례명은 필리포인데, 1565년 도미니쿠스 교단에 들어가며 조르다노로 개명하였다. 입단한지 1,2년 만에 그는 교단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이때 이미 예수상을 버리고 십자가만을 지니고 다녔다. 브루노는 예수의 신성을 의심하며, 삼위일체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572년 신부서품을 받고 신학공부를 계속하였지만, 교단과의 갈등과 마찰은 커져갔다. 결국 1576년 카톨릭 교회는 브루노를 이단으로 판정하고, 그는 교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1592년 베네치아의 종교재판소에 의해 체포되기까지 브루노는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방랑기간은 나름 행복한 시간일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 속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다시 파리를 거쳐 독일로 방랑하며 연구와 저술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1591년 여름 베네치아의 귀족 모체니고의 초청에 응한다. 당시의 베네치아는 이단에 대한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곳이었다. 고루한 귀족 모체니고에게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성모 마리아는 처녀일 수 없다는 등의 얘기를 거침없이 했다면, 브루노는 이쯤에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삶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592년 5월 22일 밤에 모체니고는 브루노를 가두고, 이튿날 이단이라며 20개 항의 고발장을 베네치아 종교재판소에 접수시켰다. 5월 24일 브루노는 악명 높은 납으로 된 감옥에 갇혔다. 모체니고의 고발장에는 브루노가 예수를 사기꾼 또는 마술사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과학적 사고로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일이 어떻게 거짓말이 아니고, 물 위를 걷거나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이 어떻게 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5월 29일 첫 심문이 행해지고, 이후 로마로 이송되어 1600년 2월 8일 이단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8년간에 걸쳐 브루노에겐 모진 고문이 가해졌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기도 했으나, 이튿날 바로 철회했던 것을 다시 철회하고 본래의 브루노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바 이성(理性)의 세기라 불리는 17세기가 시작되는 1600년 2월 17일 꽃의 광장, 캄포 데이 피오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1603년 브루노의 모든 저술은 카톨릭 종교재판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1)

브루노는 천재였다. 의문과 사색, 연구와 독서. 그러다가 섬광처럼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의 천재성은 그를 과학이나 수학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당시는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였다. 브루노는 철학자이며 과학자였고, 수학은 물론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입을 열면 술술술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언어는 아름다웠고, 논리는 정연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고 보았고, 그래서 입을 그토록 잔인하게 봉쇄했는지도 모르겠다.

2. 이탁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다

▲ 이탁오의 초상. 유ㆍ불ㆍ도의 사상적 경계를 허물고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상가.
브루노가 화형당한 2년 후 지구 정반대쪽 중국의 감옥에 갇혀 있던 한 노인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그었다. 그의 이름은 이지(李贄, 1527〜1602). 세상엔 이탁오(李卓吾)란 별호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이탁오는 1527년 10월 명(明)나라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晉江縣)에서 출생하였다. 7대조 이노(李駑)가 색목인 여종과 결혼하는 바람에 친족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여 성을 임씨(林氏)로 바꿔서 이탁오의 이름 또한 처음에는 임재지(林載贄)였다. 그러다가 수재(秀才)시험에 합격하여 천주부학(泉州府學)에 들어가며 종가의 성을 따랐고, 후에 목종(穆宗) 주재후(朱載厚)가 즉위하자 황제의 이름을 피하여 재(載)를 빼고 이지라 하게 되었다.

이탁오는 천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7세에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였는데, 명나라가 들어서며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이탁오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기도 하고, 결국 그의 자녀들이 길거리에서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대대로 가난이 대물림되었던 것 같다. 26세 되던 해에 거인(擧人)시험에 합격하였지만, 정식 임관은 3년 후에나 이루어지고, 그나마 9품 미관말직의 봉급으로는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명나라 말기로 접어들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일상사였으나 이탁오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정치하는 자들은 오직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뿐이다.” 위에 있는 자는 후안무치하고, 아래에 있는 자는 아첨에만 할 뿐,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부도 수탈도 할 줄 모르는 이탁오가 받는 봉급만으로 가족이 먹고 살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다. 결국 얼마 후 부친이 죽고, 다시 조부를 잃고, 자녀들도 어려서 요절하거나 굶어 죽어 갔다. 그리고 아내와 딸 하나만 달랑 남은 채 나이 40이 되었다.

40대의 이탁오는 벼슬도 높아지며 경제적으로는 얼마간 여유가 생겼으나 여전히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집 온 후로 고생만 하던 아내에겐 매우 미안하였지만, 벼슬에서 물러나 공부와 저술에 몰두하고 싶은 소망은 간절해져 갔다. 54세 되던 1580년, 수차례 사직상소 끝에 마침내 퇴임이 허락되었다.

이탁오는 40세에 《노자(老子)》를 읽고 이후 양명학(陽明學)에 심취하여 갔다. 그리고 《금강경》, 《능가경》, 《법화경》 같은 불교 경전을 독파하다가, 마침내 62세에 삭발하였다. 삭발하였다고 해서 승려가 된 건 아니었다. 그의 지적 호기심과 전통적 예교(禮敎)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그렇게 유·불·도(儒佛道) 삼교를 넘나들다 1599년에는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찾아가 만난다. 이후 마테오 리치가 답방하고 다시 한 번 더 만나며, 이탁오는 삼강오륜이 아니더라도 대국을 건설하는 나라도 있음을 알게 된다.

브루노와 마찬가지였나? 브루노가 죽은 1600년 3월 이탁오는 많은 친구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호북(湖北)성 마성(麻城) 용호(龍湖)의 지불원(芝佛院)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는 이미 74세였다. 마성의 지불원은 그가 《분서(焚書)》를 집필하고 《장서(藏書)》 중의 여러 논저를 저술한 곳이었지만, 또한 “이단으로 세상을 미혹하고, 음행을 선양”하는 본거지로 지칭되던 곳이었다. 이해 겨울 손에 몽둥이를 든 무리들이 지불원에 난입하였고, 절은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이탁오는 미리 대피하였지만, 1602년 탄핵을 받고 북경 근처의 통주(通州)에서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감되기 전 3월 감옥에서 자결한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은 금서(禁書)로 묶였다.

3. 이단을 공격하는 자는 모두 성인의 무리이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건 건 1517년 10월 31일이었다. 면죄부(免罪符) 판매 등 교회의 불의를 공개적으로 고발한 이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시발을 알리는 선언문과도 같았다. 루터의 반박문은 대량으로 인쇄되어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1535년에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칼뱅(1509〜1564)의 《기독교 강요(基督敎 綱要,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가 저술되었다.

이런 강렬한 개혁에의 요구에 가톨릭 또한 강하게 대응하던 시기에 브루노가 활동하였다. 브루노 개인에게는 이런 시기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브루노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일부만 맞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였을 때, 가톨릭 교회는 코페르니쿠스를 화형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연구를 도와주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코페르니쿠스에게 출판을 권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심화되면서 가톨릭은 대단히 반동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반동의 시기에 브루노가 활동했던 게 비극이라면 비극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탁오도 시대를 잘못 만난 건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의 시대는 가정제(嘉靖帝) 세종(世宗)에서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까지 어리석은 황제가 연이어 등극하며 명나라의 명줄을 재촉하던 시기였다. 관리는 부패하고, 학자들은 고루했다. 유능한 관리들은 쫓겨나고 훌륭한 현인들은 숨었다.

이런 시대에 브루노나 이탁오나 은폐와 왜곡을 비판하며 진리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단이란 이름으로 탄핵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을 공격하면 이에 해로울 뿐이다〔攻乎異端 斯害也已〕.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오는 공자(孔子)의 이 말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위의 해석처럼 이단을 공격하면 해롭다는 말이고, 둘째는 이단을 전공하면 해롭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유력한 견해로는 이단(異端)을 양극단으로 보고 극단을 추구하면 해로울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공자 당시에는 이른바 제자백가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에서 공자가 사학(私學)을 연 최초의 학자라고 한다면, 공자 당시에 제자니 백가니 하는 수많은 학파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니 정통(正統)에 반대되는 이단(異端) 또한 있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전통적인 해석 두 가지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따라서 아마도 제3의 해석이 중용(中庸)의 뜻과 어울리며 가장 공자다운 해석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단이 문제가 되었을까? 먼저 맹자(孟子)를 보자.

성왕(聖王)이 나오지 않자, 제후(諸侯)가 방자하고, 처사들이 마구 의론을 내세우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곧 묵적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양씨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요, 묵씨는 무차별적인 사랑을 말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이는 곧 금수이다.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는데, 백성들에게 굶주린 빛이 있으며,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버려져 있으면, 이는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다.”라고 하니, 양묵(楊墨)의 도(道)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간사한 말이 백성을 속여, 인의(仁義)를 꽉 막아버린 것이다. 인의가 막히면 짐승을 몰아다가 사람을 잡아먹게 하다가, 나중에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두려워 성인의 도를 지키고 양묵을 막아서 부정한 말을 추방하고 사악한 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설(邪說)이 그 마음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 일을 해롭게 하고, 그 일에서 일어나게 되면 그 정치에 해를 끼칠 것이니, 성인이 다시 태어나신다 해도 나의 말을 바꾸지 않으시리라.

옛적에 우(禹) 임금이 홍수를 막으시니 천하가 화평해졌고, 주공(周公)이 오랑캐를 겸병하고, 맹수들을 몰아내니 백성들이 편안해졌고,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완성하시니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두려워하였다. 《시경(詩經)》에 “오랑캐를 치고, 초나라 서나라를 징계하니, 나를 감히 저지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은 주공이 응징하는 바였다. 나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악한 학설을 없애며, 잘못된 행실을 막고,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찌 변론을 좋아해서 이러겠는가. 나는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양주와 묵적을 막는 자는 모두 성인의 무리이다.2)

맹자에 의하면 양주와 묵적의 주장은 이른바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비도 임금도 없는 오랑캐요 금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륜(五倫)을 부정하는 사악한 설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어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따라서 이들의 설을 비판하고, 그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이야말로 공자의 제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나오기 전에는 다 굶어 죽었다는 말인가. 이탁오는 말한다.

만약 반드시 공자로부터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면, 천년 이전 공자가 없을 때는 끝내 사람이 될 수 없었단 말인가.3)

맹자는 오직 공자의 도만이 바른 도이고 다른 학설이나 주장은 모두 이단의 사설이라고 하여 이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삼았다. 이탁오는 말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지만, 정작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서 연극을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한다는 소리에 덩달아 따라 하는 장단일 뿐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내가 짖은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을 수밖에……4)

한 마리의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짓는다. 그러면 온 동네 개들이 따라서 시끄럽게 짖어댄다. 어떤 개가 더 큰 소리로 더 소리 높여 짖어대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성인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짖어댔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개로 살지 않겠다는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은폐되고 왜곡된 껍데기를 걷어내고 그 속살을 제대로 보자는 말을 했다고 해서.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바쳐진 모든 영광과 칭송을 걷어내면 어떤 모습이 드러날까? 어쩌면 브루노에게 이단 판결을 내린 사람들은 그 민낯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브루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형량이 선고되는 것을 듣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나의 두려움보다 오히려 더 클 것이다.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예수회 사제들은 브루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쇠꼬챙이로 혀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 세계로 다니며 예수를 전파했다. 이탁오가 만난 마테오 리치도 예수회 소속 신부였다.

주) ----------
1) 이상의 언급은 강영계 선생이 번역하고 한길사에서 펴낸 조르다노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외》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밝힌다.
2)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3) 이지, 《분서(焚書)》 권1 〈답경중승(答耿中丞)〉
4) 옌리예산, 주지엔구오 저, 홍승직 역, 《이탁오 평전》

김문갑 | 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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