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四顧無人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衣鉢誰傳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 四顧無人
봄 산에 꽃은 웃고 새는 노래하며 春山花笑鳥歌
가을밤에 달은 밝고 바람은 시원해라 秋夜月白風淸
바로 이러한 때에 正恁麽時
몇 번이나 무생(無生)의 한 곡조 노래를 불렀던가 幾唱無生一曲歌
한 곡조 노래를 아는 사람 없으니 一曲歌無人識
시절인가 운명인가 어이하리오 時耶命耶且奈何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山色文殊眼
물소리는 관음의 귀이며 水聲觀音耳
소를 몰고 말을 모는 이가 보현이요 呼牛喚馬是普賢
장삼이사가 본래 비로자나불일세 張三李四本毘盧
부처와 조사의 말씀이라 하지만 名佛祖說
참선과 교학이 어찌 다르리오 禪敎何殊
단지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特地生分別
돌사람은 젓대를 불고 石人唱笛
나무말은 졸고 있구나 木馬打睡
사람들은 자성을 알지 못하고서 凡人不識自性
성인의 경계이지 나의 분수 아니라 하니 謂言聖境非我分
가련하구나 이런 사람들은 지옥의 잔재로다 可憐此人地獄滓
이내 전생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回憶我前生事
사생과 육취 온갖 험한 곳에서 四生六趣諸險路
오랜 겁 동안 윤회하며 신고를 겪었네 長劫輪廻受苦辛
오늘 눈앞에서 자성을 분명히 보니 今對目前分明
이내 마음 견딜 수 없구나 使人叵耐兮
다행히 숙세의 인연이 있어 幸有宿緣
사람이요 장부로 태어나 人而丈夫
출가하여 도를 얻었으니 出家得道
사난(四難) 중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어라 四難之中無一闕
어떤 사람이 소가 되면 콧구멍 없다 장난으로 말하는데 有人爲戱言作牛無鼻孔
그 말을 듣자마자 因於言下
나의 본래 마음을 깨달으니 悟我本心
명상(名相)이 모두 공(空)하여 名亦空相亦空
공하여 텅 비고 고요한 곳에 늘 광명이 나오는구나 空虛寂處常光明
이 말을 한 번 듣고부터 모든 것을 깨달으니 從此一聞卽千悟
눈앞에는 홀로 밝은 적광토(寂光土)요 眼前孤明寂光土
정수리 뒤에는 신령한 금강계(金剛界)로다 頂後神相金剛界
사대(四大)와 오음(五陰)이 청정한 법신이라 四大五陰淸淨身
극락세계는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이요 極樂國鑊湯兼寒氷
화장찰해(華藏刹海)는 검수지옥과 도산지옥이로다 華藏刹劍樹及刀山
법성토(法性土)는 썩은 흙이요 똥무더기이며 法性土朽壤糞堆
대천사계(大千沙界)는 개미굴이요 모기 눈썹일세 大千界螘穴蚊睫
삼신(三身)과 사지(四智)는 三身四智
허공과 만상(萬象)이라 虛空及萬像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본래 천진하니 觸目本天眞
매우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也大奇也大奇
솔바람이 서늘하니 松風寒
사방은 푸른 산이요 四面靑山
가을달이 밝으니 秋月明
하늘은 물처럼 맑아라 一天如水
노란 국화와 푸른 대나무 黃花翠竹
꾀꼬리 소리와 제비 소리에 鶯音燕語
늘 진여(眞如)의 큰 작용이 常然大用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으니 無處不現
천자 자리를 준들 어찌 받으랴 市門天子何須取
평지에 파도를 일으키는 격이요 平地上波濤
대궐의 옥새는 참으로 괴이하니 九天玉印眞恠在
해골 속에 눈동자로다 髑髏裏眼睛
한량없는 부처가 늘 눈앞에 나타나니 無量佛祖常現前
초목과 깨진 기왓장이 그것이요 草木瓦石是
화엄경과 법화경을 내가 늘 설하니 華嚴法華我常說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이 그것이라 行住坐臥是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니 無佛無衆生
이는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是我非妄言
지옥을 바꾸어 천당을 만드는 것이 變地獄作天堂
모두 나의 손에 달려 있고 摠在我作用
백천 가지 법문 한량없는 이치가 百千法門無量義
흡사 꿈을 깨고 연꽃이 핀 것 같아라 恰似夢覺蓮華開
이변(二邊)과 삼제(三際)를 어디서 찾으랴 二邊三際何處覔
가없는 시방세계가 큰 광명인 것을 十方無外大光明
한 마디로 말하면 一言而蔽之乎
내가 대법왕(大法王)이라 我爲大法王
모든 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於法摠自在
시비와 호오(好惡)에 是非好惡
어찌 걸림이 있으랴 焉有罣碍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無智人聞此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서 以我造虛語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겠지만 不信又不遵
귀가 뚫린 사람이 있다면 若有穿耳客
바로 믿고 의심하지 않아서 諦信卽無疑
곧 안신입명하는 곳을 얻으리라 便得安身立命處
속세의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寄語塵世人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一失人身
만겁에 다시 얻기 어려운데 萬劫難逢
하물며 이 덧없는 목숨은 況且浮命
아침에 저녁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朝不謀夕
눈 먼 나귀가 발길 닿는 대로 가서 盲驢信脚行
편안한지 위태한지 전혀 모르는 꼴이라 安危摠不知
저 사람도 이러하고 이 사람도 이러하구나 彼如是此如是
어이하여 나에게 와 무생(無生)을 배워서 何不來我學無生
인간과 천상의 대장부가 되지 않는가 作得人天大丈夫
내가 이처럼 입이 아프게 재삼 당부하는 것은 吾所以如是勞口再三囑
예전에 나그네가 되어 봤기에 나그네를 몹시 불쌍히 여기는 것일세 曾爲浪子偏憐客
아아! 그만이로다 嗚呼已矣夫
대저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衣鉢誰傳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는 것을 四顧無人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四顧無人
의발을 누가 전해줄거나 衣鉢誰傳

게송을 붙이노라 頌曰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 忽聞人語無鼻孔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 頓覺三千是我家
유월이라 연암산 아래 길에 六月鷰巖山下路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野人無事太平歌

해설

동학사 강사로 있던 경허는 1879년 34세 때 콜레라로 사람이 죽어가는 마을을 지나다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무상을 절감하고 발심한다. 동학사로 돌아와 용맹정진하던 중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된다.”고 하자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다.”고 대답했다는 말을 듣고 문득 견성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 속가의 형인 태허(太虛)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누이와 함께 살고 있던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와 보임한다. 1881년에 보임을 마친 뒤 법맥이 단절되어 자신의 견성을 인가해 줄 스승이 없는 현실을 알고 이 오도가와 오도송을 읊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도가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할 것인가! 의발을 누가 전할 것인가!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라고 크게 탄식한 것이다. 이 오도가와 오도송은 당시 제방에 두루 알려져 경허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방거사(龐居士)는 견성을 “마음이 공하면 급제해 돌아간다.[心空及第歸]”라 표현했거니와 선(禪)은 심공(心空)의 도리를 깨닫는 것 밖에 특별한 일이 아니다. 경허는 음주 식육을 하는 까닭을 묻는 화엄사 강백(講伯) 진응(震應)의 물음에 자신은 성공(性空)을 보고 있어 걸림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성공(性空)은 심공(心空)과 같은 말이다. 오도가와 오도송은 성공의 경계를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오도송의 해석에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먼저 야인(野人)이 누구냐는 것이다. 여기서 야인을 경허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보기 쉽지만 연암산 아래에서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 농부가 일을 하면서 부르는 농가 소리가 그대로 해탈한 무사인(無事人)의 태평가란 말이다. 능소(能所)가 끊어진 성공(性空)의 경계를 드러내는 자리에서 ‘나는 일 없는 사람’이라 하면 ‘아견(我見)’에 떨어질 수 있다. 용화사에서 녹음한 전강(田岡)스님의 술회에서도 당시는 모내기하는 철이었고 태평가는 농군들의 “여여 여여로 상사뒤여”라 부르는 농가 소리라 하였다. 위 오도가에서 “소와 말을 부리는 사람이 보현이요 장삼이사가 본래 비로자나불이다.”라고 한 구절이 바로 이러한 광경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아가(我家)’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내 집’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 아가는 ‘나’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문에서 ‘가(家)’ 자는 뜻 없는 접미사로 곧잘 쓰인다. 예컨대 한산시(寒山詩)에 “나는 은거하기 좋아해 거처에 번잡한 속진 없어라[吾家好隱淪 居處絶囂塵].”라고 하였다. 한문에서는 자기를 자가(自家)라고도 한다. 오도송에서 경허의 경계는 온 우주 삼라만상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나와 둘이 아닌 것이지, 우주를 내 집으로 삼고 들어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집이라 해석하면 나 말고 내가 머무는 집이 또 있게 된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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