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버넌트>(미국, 2015)는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버드맨>으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에서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차기작이기에 나름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제73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걸 보고 한껏 기대를 갖고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졸음이 오더니 156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거의 자다 깨다를 반복했습니다.

전문가들의 극찬과 달리 영화는 지겹고 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별로야, 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들어 제일 추운 날 다시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 40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일 추운 날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영화는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을 만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답 또한 관객 스스로 찾도록 유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상황에 감정이 이입되지 않으면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영화 40도의 추위를 온몸으로 느껴야 하고, 만신창이가 된 육체가 겪는 고통과 아픔을 주인공과 함께 느껴야 했습니다. 주인공이 겪는 고통이 느껴졌을 때 비로소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여기서도 이렇다 저렇다 하고 감독의 철학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관객이 스스로 질문을 하고, 또 답을 찾도록 감독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할 뿐이었습니다.

<레버넌트>는 19세기 초 북아메리카를 배경으로 휴 글래스라는 모피 사냥꾼의 실화를 소재로 했습니다. 휴 글래스는 모피회사에 소속된 사냥꾼들의 길잡이가 돼 비버사냥을 나섰다가 회색 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온몸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휴 글래스가 얼마 못 살 걸로 판단한 앤드류 대위는 존 피츠제랄드(톰 하디)와 브리저에게 돈을 주기로 하고 휴 글래스가 죽으면 묻어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잔류팀에는 휴 글래스의 아들도 있었는데, 아들은 인디언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에게 은근 무시당했는데, 존은 특히 ‘잡종’이라며 이들 부자를 미워했습니다. 존은 휴 글래스가 빨리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 일행을 뒤따라갈 수 있고, 돈도 빨리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되자 휴 그래스를 직접 죽이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동료인 브리저에게는 인디언의 습격이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존과 브리저는 휴 글래스를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살해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휴 글래스는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복수라는 삶의 목적이 생겼기에 기필코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휴 글래스는 초인적인 의지로 무덤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걸을 수도 없는 몸이었기에 기어서 무작정 존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살은 썩어들어 가고 인디언의 습격을 받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말의 내장을 꺼내고 뱃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하고,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 이런 걸 견뎌내고 그는 북아메리카 대륙 4,000km를 걸어 드디어 존 피츠제럴드를 찾아냈습니다.

한 인간이 불굴의 의지로 가장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생존기가 영화의 주 골격입니다. 북아메리카의 살벌한 추위 속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짐승의 생살을 뜯어 먹으면서 온갖 위협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그렇게 아들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남았는데, 그런데 복수의 순간 휴 글래스는 복수가 생의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그만두었습니다. 결국, 존 피츠제랄드는 휴 글래스가 아니라 인디언의 손에 죽고, 영화는 약간 싱겁게 끝났습니다.

이 부분 때문에 스토리가 약하다는 평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한 개인의 죽음과 삶을 오가는 순간순간의 절박한 체험이 주가 되는 영화입니다. 매 순간 죽음과 맞닥뜨리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삶이라는 게 얼마큼 죽음과 밀접한 것인지를 깨닫도록 유도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주치는 상황은 관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곳은 육체의 세계였습니다. 관념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살벌하고 절박했습니다. 한 무리의 늑대가 말을 물어뜯고 말의 피가 낭자하고, 어디선가 인디언이 쏜 화살이 날아오고, 생명의 위협 앞에서 관념은 하찮은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복수가 의미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수라는 것은 관념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복수를 하러 온 휴 글래스에게 존 피츠제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껏 복수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느냐? 그런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느냐?”

복수한다 해도 아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으며 그의 복수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그만두었습니다. 복수는 신에게 맡기고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주인공이 삶과 죽음이라는 위협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자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피로가 느껴졌습니다. 살아남는 일이 힘든 것이고, 그렇다고 쉽게 죽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기 싫다고 전전긍긍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 해서 죽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도망가던 존 피츠제럴드가 결국 인디언에게 죽음을 당하고,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기에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휴 글래스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수는 신에게 맡기고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영화의 풍광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미국 등지에서 촬영했으며, ‘매직 아워’라고 자연광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골라 촬영했기에 영화에서 보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풍경이었습니다. 늑대는 말을 물어 죽이고, 인디언은 백인을 죽이고, 백인은 인디언을 죽이고, 또 사람은 동물을 죽여 살코기를 뜯어먹고, 누구는 누구를 배신하고, 영화 40도의 설원이었지만 생존을 향한 치열한 의지로 에너지는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동물과 인간의 이런 살육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늑대가 말을 물어뜯는 건 자연의 법칙이며, 심지어 존 피츠제럴드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나름 변호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다른 일행의 아들을 죽이고 또 일행을 배신한 것이라고. 즉 자기 생존에 지나치게 골몰했을 뿐이라고. 이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존 피츠제럴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기적인 인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존의 상관인 앤드류 대위도 만신창이가가 된 휴 글래스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대원들에게 큰 부담이라고 판단해 총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며, 인디언 여자에게 먹을 걸 나눠주기도 하는 등 자비심 많아 보이는 브리저도 휴 글래스가 죽지 않은 걸 알았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서 도망갔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었고 영화에서 악당인 존 피츠제럴드는 보다 적극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대놓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 인간의 생존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결국 이렇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는 것일까요?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을 꼽으라면 주인공인 휴 글래스가 배고픔과 추위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만난 인디언입니다. 동물의 시뻘건 생간을 뜯어먹고 있던 인디언 남자는 다른 인디언의 습격으로 가족을 잃고 혼자 떠돌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휴 글래스에게 고기를 나눠줬던 남자는 밤에 휴 글래스가 추위로 죽어가자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밤 그를 위해 밤새 장작을 피우고 작은 움막을 만들어 휴 글래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살벌한 자연에 던져진 인간과 동물이 다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 치는데 유일하게 이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의 차가운 밤을 희생했습니다. 영화 내내 주인공의 살벌한 처지를 따라가며 계속 긴장해야 했는데 유일하게 긴장감이 풀리고 여유가 생겨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인디언 남자의 희생으로 휴 글래스는 목숨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된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의 목에는 ‘나는 짐승이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가장 인간적인 남자였는데, 가족도 아니고 처음 만난, 그것도 자신들에게는 적이나 마찬가지인 백인을 돕기 위해 밤새 애썼던 남자의 희생은 마치 성자의 모습 같았습니다. 동물이고 사람이고 생존계는 자신의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고, 다른 인간을 배신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감독은 어쩌면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꽤 긴 시간 판을 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살벌한 생존계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이기심과 숭고함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감독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쳐도 죽음은 신의 영역이다, 그러니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 치기보다는 차라리 좀 더 숭고한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떠하냐고.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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