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 한국이 낳은 가장 탁월한 불교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지정학적으로 신라는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도입이 고구려(372년)나 백제(384년)보다도 150년 이상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가 태어날 무렵은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527년)된지 겨우 90년이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라불교의 파급속도로 보아서는 불교의 순수교리에 대하여 연구할 기반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원효 이후 신라 통일기 불교가 교학에 대하여 쌓고 있는 업적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1)

당시 민중은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매우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사회 상황에도 승려 대부분의 삶과 수행은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왕실 내지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두 입장에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조금 자세하게 보자.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불교계는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통일 이전은 불교가 정치이념으로서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수용되는데, 이는 국가체제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불교를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이후가 되면 신라 왕실은 통치의 정당성을 유교적 정치이념(德治, 王道政治)에서 찾고자 한다. 또한 이때부터 신라의 불교는 국가의 통치체제 아래에 들어가는 ‘국가불교’의 모습을 심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체제 유지를 위한 불교의 효용이 사라지면서, 불교는 그 본래적(本來的) 의미(意味)를 상당 부분 회복(回復)하게 된다. 그 결과 불교의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며, 세계와 인생의 가치에 대한 반성이나, 불교신앙을 통하여 삶의 위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민중들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중요하여, 사회적 비중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 결과 통일 이후 신라불교는 사회 구성원 전체로 확산하면서, ‘대중불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중불교의 선구자들은 혜숙(慧宿, 생몰년 미상), 혜공(慧空, 생몰년 미상), 대안(大安, 571~644) 등의 불승(佛僧)들이었는데, 이들은 민중 속에서 입전수수(立廛垂手)하였던 대중불교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원효(元曉)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촌락이나 저잣거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잡담하는 가운데 불법을 말하여 대중들의 실생활을 불교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2)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로 홀로 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사이에서 실계(失戒)하면서 설총을 낳는다. 이것은 655년에서 660년, 즉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실계 뒤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는데, 이 실계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된다.

원효는 어느 날 한 광대가 이상한 모양을 한 큰 표주박을 가지고 춤추는 놀이를 구경하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들도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이다. 그는 그 노래를 ‘무애가(無㝵歌)’라 불렀다.

원효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고,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혹은 금빛 칼과 쇠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혹은 《화엄경》에 대한 주소(註疏)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坐禪)하는 등 임의로 기회를 좇아 생활하되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행적 또한 뚜렷한 어떤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뱉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때로는 한 날 한 시에 여러 곳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온 천하를 다 찾아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원효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찬술할 것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여 온다.

한번은 국왕이 100명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을 초청하여 인왕경대회(仁王經大會)를 열었을 때 상주(湘州) 사람들이 원효를 천거하자, 다른 승려들이 그 인품이 나쁘다고 헐뜯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왕후가 종기를 앓게 되어서 아무리 좋은 약을 다 써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왕이 왕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영험이 있다는 명산대천을 다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리던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다른 나라에 보내어 약을 구하게 하면 그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왕은 곧 당나라에서 좋은 약과 의술에 능한 사람을 구하도록 사신을 보냈다. 왕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바닷물 속으로부터 한 노인이 솟아올라 사신들을 용궁으로 데리고 갔다.

용왕은 자기의 이름을 금해(鈐海)라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경들 나라의 왕비는 바로 청제(靑帝)의 셋째 공주요. 우리 용궁에는 일찍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불경이 전하여 오는데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으로 되어 있소. 원만하게 열린 보살행(菩薩行)을 설명하여 주는 불경이오. 신라 왕비의 병으로 인하여 좋은 인연을 삼아, 이 불경을 당신들의 나라로 보내어 널리 알리고자 사신들을 부른 것이오.”

그리하여 원효가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 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설법하게 되었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와 왕자·공주 그리고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절에서 온 명망 높은 고승들에게 원효는 강해(講解)를 시작하였다. 그의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하고 질서정연하여, 오만하게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찬양하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강설을 끝내고 원효는 “지난 날 나라에서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그 속에 끼일 수도 없더니, 오늘 아침 단 한 개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마당에서는 나 혼자 그 일을 하는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승들은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원효는 그 뒤 조용한 곳을 찾아 수도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 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龍樹)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사유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 저술이다.

원효는 그의 삶 대부분을 신라 삼국 통일(676년) 과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게 된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분열과 배타의 정신은 그 모습을 극명(克明)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원효는 성장하면서 신라․고구려․백제 사이의 통일 전야의 그 극렬하고 빈번한 전쟁의 참상을 통해서, 반불교적인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효는 부정(否定)과 배제(排除), 분리(分離)와 정복(征服)의 시대를 당하여, 포용(包容)과 공존(共存), 화해(和解)와 존중(尊重)의 정신으로, 당대를 포섭하고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해법을 불교 사상 속에서 ‘한 마음〔一心〕’으로 파악하고 ‘화쟁(和諍)’으로 압축하여 온 몸으로 실천하였다. 이 점은 원효의 행적에, 앞서 언급했던 원광이나 자장과는 달리, 국가 혹은 호국(護國)에 대한 활동이나 저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3)

원효 불교 대중화 운동의 실천은 불교 대중화를 위한 이론적 탐구가 전제되어 있다. 그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유식 계통에 대한 것이다. 그가 유식에 이렇게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은 범부들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심식(心識)을 철저하게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효는 먼저 마음의 분석을 위한 심식연구를 한 다음 수행실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다.4)

주)----------
1) 고익진, <원효사상의 화쟁적 성격>, 《한국의 사상》(서울: 열음사, 1984), p.79.
2) 은정희, <원효의 번뇌론>, 《한국의 불교사상》(서울: 예문서원, 2004), p.83.
3) 고익진, <원효사상의 화쟁적 성격>, p.79.
4) 은정희, <원효의 번뇌론>, p.83.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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