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송(北宋)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부분. 당시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의 번화한 거리와 활기찬 사람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B.C. 225년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으로 물에 잠겼던 이 세계적인 도시는 1642년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일어났을 때 또다시 물에 잠겼다.

1.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믿지 마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느냐, 죽느냐? 이기면 혁명이요 패하면 반역이다. 목야(牧野)의 평원을 바라보며 무왕(武王)은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서쪽 변방에서 아버지 문왕(文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은인자중, 오늘을 준비했다. 실패는 나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와 뜻을 함께한 연합국 모두의 몰살이다. 상대는 포악하기로는 걸왕(桀王)을 능가하는 주왕(紂王)이다.

주왕이 천자(天子)의 자리에 등극하고 은(殷)나라는 덕을 잃어갔다. 주왕이 달기(妲己)와 함께 연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지내는 동안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충신 비간(比干)의 간언에 주왕은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라는데 확인해보자며 비간의 배를 갈랐다. 그런 포악함에 천하가 진저리를 떨 즈음 마침내 무왕이 기병한 것이다.

전투는 처절했다. 상대는 천자(天子)였다. 비록 신망을 잃었어도 엄청난 군사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서경(書經)》 〈무성편(武成篇)〉에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은나라 군대가) 창을 거꾸로 들고 뒤에 있던 자기편 군사를 공격하며 달아나니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루고 그 위로 절굿공이가 떠내려갔다.1)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죽었기로, 피가 시냇물처럼 흘러 절굿공이가 떠내려갈 정도였을까? 이 부분은 분명 역사가(歷史家)의 과장일 터. 이 과언을 맹자(孟子)는 포착해낸다. 맹자는 말한다.

《서경》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 나는 〈무성편〉의 글은 그 중의 두서너 쪽만 취한다. 어진 자는 천하무적이다. 지극히 어진 사람이 지극히 어질지 못한 사람을 치는데 어찌 그렇게 피가 흘러 절굿공이가 떠내려갈 정도였겠는가? 2)

《서경》이란 책을 다 믿을 수 없다는 맹자의 말은 분명히 옳다. 과장 정도가 아니라 없는 말도 만들어 내었으니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맹자의 이런 주장은 좀 낯간지럽다. 진실 여부를 따진다고 치면 《서경》의 요순(堯舜)에 대한 기록 또한 믿을 수 없다. 이 시리즈 앞 15회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밝힌 것처럼 《서경》에서 말하는 요순 선양(禪讓)은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순 선양을 부정하는 내용이 실린 《죽서기년(竹書紀年)》이란 책은 맹자가 만났던 위(魏)나라 양왕(襄王) 때까지의 역사서이다. 위양왕 때 만들어져 위양왕의 무덤에 묻혔던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양왕의 아버지 혜왕(惠王)의 초빙을 받고 위나라에 와 있었다. 그러니 맹자가 《죽서기년》의 내용을 전혀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요순 선양에 대한 의심스런 말들을 뻔히 알면서도 외면하였던 건 아닐까?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을 말했다. 맹자가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임금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3)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요순은 《서경》에 실린 바로 그 요순이었다. 그렇다면 맹자는 목적한 바에 따라 《서경》을 취사선택, 은폐 왜곡한 건 아닐까?

2.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천하를 통일할 것이다

맹자는 공자 사후 대략 100여년 정도 지나 태어났다. 비록 시차는 100여년에 불과하지만 시대상황은 매우 달랐다. 공자의 시대는 주(周)나라 천자를 받들고 그 문화를 존중하는 이른바 존주(尊周)의 기풍이 아직은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 만큼이나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를 지켜야한다는 공자의 주장은 호소력이 있었다. 비록 시대는 많이 어지러워졌으나 춘추대의(春秋大義)는 나름 살아 있었고,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하지만 맹자의 시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제후들은 더 이상 천자를 배알하지 않았다. 기존의 질서체제는 완전히 와해되었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었다. 천하는 전쟁으로 날이 새고 전쟁으로 날이 지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이기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이 필요했고, 군사력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부국강병은 이 시대의 지상과제였다.

양혜왕 :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맹자 :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입니다.4)

양혜왕은 사적인 이익이나 탐하는 소인배 군주는 아니었다. 왕이 말하는 이익은 국가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이었다. 이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들여가며 맹자를 초빙한 것이다. 하지만 맹자는 이런 왕의 기대를 한마디로 저버린다. 왕에게 도리어 핀잔에 가까운 말을 하며 자신은 인의도덕을 말하러 왔노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과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 대장부(大丈夫)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이익을 추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역설한다. 왕이 내 나라의 이익을 말하면 대부는 내 집안의 이익을 말하며, 선비나 서인(庶人)들은 내 몸의 이익을 말하게 된다고. 그리하여 상하가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니, 마침내 천자를 시해하는 자가 제후에게서 나오고, 제후를 죽이는 자가 대부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이런 공자님 말씀이 왕의 귀에 박힐 리가 없다. 시대는 이미 천자고, 제후고, 대부고, 뭐고 없었다. 그저 힘 있는 자가 최고인 시대였다. 부국강병은 피할 수 없는 대세였고 이를 위해 백성들은 동원되고 조직되었다. 양혜왕은 말한다.

과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한다. 하내(河內)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들은 하동(河東)으로 옮기고, 곡식은 하내로 옮겼다. 하동이 흉년이 들어도 마찬가지로 이런 정책을 폈다. 이웃나라를 살펴보면 과인이 마음 쓰는 것만 못한데, 어찌하여 이웃나라의 백성들은 줄지 않고, 과인의 백성들은 많아지지 않는가? 5)

양혜왕은 분주히 백성들의 거처를 옮기고 곡식을 다시 분배하며 부강한 나라로 재건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진(秦)나라는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나라를 아예 뿌리부터 바꾸었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군현제(郡縣制)를 도입하고, 호적(戶籍)를 작성하여 열 집, 다섯 집씩 묶어 연좌(連坐) 시키는 십오제(什伍制)를 시행하였다. 백성들은 종횡으로 조직되고 서로를 감시하였으며, 필요에 의해 적절히 동원되었다. 천하통일은 이런 진나라의 몫이었다. 어쩌면 양혜왕은 맹자에게서 이런 상앙의 비책을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정작 눈앞에서 상앙을 놓치고 엉뚱한 데서 찾은 꼴이다. 시리즈 6회 〈변법(變法), 새로운 질서〉에 등장하는 위나라 혜왕이 바로 맹자가 만난 양혜왕이다.

양(梁)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의 하나인 위(魏)나라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에 대패하여 황하 서쪽 지역을 잃고,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동쪽인 대량〔大梁, 현재의 카이펑(開封)〕으로 천도하면서 양나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 전쟁에서 진나라 군대를 통솔한 이가 바로 양혜왕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앙이다.

양혜왕이 맹자를 초빙하였을 때는 대패 이후 대량으로 천도하였을 때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양혜왕 재위 35년에 예를 낮추고 후하게 대접하며 현자를 초빙하니 맹자가 양에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절치부심, 고토를 회복하고 다시 칠웅의 위용을 되찾고자 하는 양혜왕의 열망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열망은 그저 열망일 뿐이었다.

기원전 225년 진나라는 대량성(大梁城)을 공격하였다. 대량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3개월을 버텼다. 장마가 시작되자 진나라 장군 왕분(王賁)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대량성을 물속에 잠기게 하였다. 대량성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고, 전염병으로 죽고, 굶어 죽었다.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놓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맹자는 양혜왕도 만나고, 혜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양양왕(梁襄王)도 만났다. 양나라의 두 왕이 대를 이어 맹자를 만나 고견을 들었으나, 멸망을 막지는 못하였다.

맹자가 양양왕을 만나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왕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임금 같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도 위엄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하는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하나로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누가 통일 시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다시 묻기에, 나는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통일시킬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6)

양혜왕이나 양양왕이나 어차피 능력이 안 되는 왕이었다. 무능한 지도자를 둔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현대인도 잘 알고 있다. 먼 옛날로 돌아가지 않아도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게 그런 모습들이다. 그나마 민주주의 시대는 정기적으로 지도자를 바꿀 수 있지만, 왕조시대에는 혁명의 피를 부르지 않고는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맹자는 자신의 말 그대로 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듯 이런 왕을 찾아 헤맸다. “500년이면 반드시 훌륭한 왕이 나온다.……문왕과 무왕이 나와 주나라를 세운지 이미 700년이다. 이제 진정한 왕이 나타날 때도 되었다”7)며 학수고대하였다.

3. 백성이 가장 귀하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건 아주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버리지만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 순임금은 사물의 이치에 밝고 인륜에서 살피셨는데, 이는 인의에 따라 행하신 것이지 인의를 행한 게 아니다.8)

먹고 배설하며, 자손을 낳아야 하는 건 인간이나 금수나 다를 게 없다. 식욕과 색욕으로 인간을 말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금수와는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 작은 게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지하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자 뛰어드는 행위, 마을 사람들을 살리고자 기꺼이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거는 일, 이런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개나 돼지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금수와의 차별성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증명된다. 이게 인의(仁義)이다. 인의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의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도덕성을 쉽게 잃어버리지만, 요순 같은 성인은 잘 보존한다. 그리하여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모두 선천적으로 내재한 인의에서 나온다. 인의는 남을 사랑하고 반듯이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맹자는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 사람들은 굶어 죽었고, 칼에 맞아 죽었고, 물에 빠져 죽었다. 맹자는 이런 죽음을 정당화하는 사상가를 비난하였고, 백성을 사지로 이끄는 위정자를 바꾸고자 하였다. 맹자는 기꺼이 논쟁하였고, 누구 앞이라도 당당하였다.

제선왕(齊宣王) : 탕왕이 걸왕을 몰아내고 무왕이 주왕을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 : 경전에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선왕 :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게 가능합니까?
맹자 :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자를 일개 필부(匹夫)라고 합니다. 일개 필부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9)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왕은 이미 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를 죽여도 이는 시해가 아니다. 다만 도적 하나를 주살한 것일 뿐이다. 맹자는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10) 이런 주장 때문에 《맹자》란 책은 금서(禁書)가 되곤 하였다.

맹자는 누구보다 백성(인간)을 사랑했고, 백성(인간)을 위해 싸웠다. 그의 주장은 옳은 것이고, 그의 논쟁 또한 위대한 것이었다. 치열한 논쟁과 정연한 설득을 펼치며 맹자는 요순을 말하였고, 공자를 거론하였다. 탕(湯)임금과 이윤(伊尹)의 아름다운 이야기, 문왕과 무왕의 탁월한 능력,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으로 내려오는 성인들의 거룩한 자취가 맹자의 입을 통해 다시 채색되었다. 어떤 것은 더 드러나고, 어떤 것은 감춰졌다. 은폐와 왜곡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기원전 260년, 진(秦)나라와 조(趙)나라 군대가 장평(長平)에서 대치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나라의 젊은 장군 조괄(趙括)은 진나라의 백전노장 백기(白起)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나라의 40만 대군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항복한다. 그리고 백기는 이 40만을 생매장하였다.

대량성을 물바다로 만든 나라도 진나라였다. 엄청난 사람들을 죽이면서 진나라가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천하는 살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즐기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맹자의 예언은 틀렸다.

맹자의 예언이 틀렸다고 해서 그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다. 맹자는 여전히 위대한 사상가이고, 뛰어난 선각자이다. 그의 인간애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을 위한 투쟁은 지성사의 위대한 유산이다. 《맹자》는 권력의 호오(好惡)에 따라, 때론 크게 강조되고 때론 금서로 묶였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여야 할 때만 보여진 게 맹자가 그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주) ----------
1) 《서경(書經)》 〈무성(武城)〉
2) 《맹자(孟子)》 〈진심(盡心)〉
3) 위의 책, 〈공손추 하(公孫丑下)〉
4) 위의 책, 〈양혜왕 상(梁惠王上)〉
5) 위의 책
6) 위의 책
7) 위의 책, 〈공손추 하(公孫丑下)〉
8) 위의 책, 〈이루 하(離婁下)〉
9) 위의 책, 〈양혜왕 하(梁惠王下)〉
10) 위의 책, 〈진심 하(盡心下)〉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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