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열반이라 하는가. 우리는 일체의 번뇌를 끊음을 열반이라고 하고, 부처님이 입멸에 드는 것을 열반이라고도 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다양한 법문으로 답하고 있다.

우선 문자적인 풀이로는 ‘열(涅)’은 ‘아님〔不〕’이란 뜻이고 ‘반(槃)’은 ‘멸한다’는 뜻이므로, ‘멸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반’은 ‘덮는다〔覆〕’는 뜻이 있어서 ‘(번뇌)에 덮이지 않았다’는 뜻을 ‘열반’이라고 한다. 또 ‘반’은 ‘거래’의 뜻이 있어서 ‘열반’은 ‘(생사에)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음’을 뜻한다. 이외에도 ‘반’은 ‘취(取)’의 뜻, ‘일정하지 않다’는 부정(不定)의 뜻, ‘새 것과 낡은 것〔新故〕’의 뜻, ‘장애〔障〕’의 뜻이 있어서, ‘탐·진·치를 취하지도 장애되지도 않음’을 ‘열반’이라고 하고 있다.

<고귀덕왕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 열반에 대해 밝히고 있다.

먼저 열반이 이와 같이 생사고해의 번뇌를 여의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이미 일체의 번뇌를 여의고 모든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였는데 왜 열반에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은 것은 마왕 파순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너는 궁금하게 기다리는 생각을 내지마라. 지금부터 석 달 후에 내가 열반에 들리라”고 입멸의 선언을 하셨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석가모니부처님은 그 석 달 후에 꾸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모습을 보인 것이고, 실로 부처님은 일체고해를 여의고 정각을 이루어 열반에 드셨으므로 다시 열반에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멸도함이 열반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석 달 후에 열반에 든다고 선언하셨는가.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입멸의 열반을 보이신 것은, 영원히 세상에 주하는 모습을 보이면 악세의 중생들은 부처님이 항상 계시어 영원하므로 부지런히 정진할 생각을 내지 않고 게을러서 불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 중생들로 하여금 악(惡)을 막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선(善)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열반에 든다고 선언하셨다고 한다.

첫 번째 악을 멸하기 위해 열반에 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성문 제자들은 때때로 분쟁을 일으키고, 악한 비구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어기며 계율을 범하고 청정하지 못한 물건을 받아 이양(利養)을 구하면서 스스로는 무루지혜를 얻었다고 칭찬한다. 또한 다른 이를 헐뜯고 욕하면서 삼보와 계율과 화상에 공경하지도 않고 이익을 취하는 물건을 받으라고 한다. 이들이 심지어 부처님이 허락하였다고 하거나 나쁜 사람들이 부처님의 말을 믿지 아니하므로, 부처님은 파순에게 “너는 궁금하게 기다리지 말라. 이제부터 석 달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하였다.

곧 부처님은 이러한 악한 중생들로 인하여 성문을 배우는 제자들로 하여금 나의 몸을 보지 못하고, 나의 법을 듣지 못하게 하며, 여래가 멸도에 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살들은 내 몸을 보고 내 법을 들음으로 내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며, 성문제자들이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말하더라도 여래는 사실 열반에 들지 아니한다.

만약 여래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잠자코 입멸에 들어 있는 것을 열반에 든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는 그는 옳지 않고, 부처의 제자가 아니며, 바른 소견을 가진 자가 아니며, 나쁜 소견을 가진 자이며, 심하게 말해서 마군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를 장자의 아들 비유, 눈의 장애자 비유, 안개와 구름의 비유, 흑산의 비유 등을 들어 설명한다.

첫째 비유는 어떤 장자가 아들들을 버리고 다른 지방에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 아들들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는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지만 아들들은 잘못 생각하여 죽은 줄로 아는 것처럼 성문 제자들도 이와 같아서 부처의 진실한 열반을 알지 못하여 꾸시나가가라 성 사라 쌍수 사이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다고 하지만, 실로 열반에 들지 아니한 것을 성문 제자들이 열반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비유는 마치 밝은 등불을 어떤 사람이 가렸을 때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하지만 등불은 실제로 꺼진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성문 제자들이 혜안이 있으면서도 번뇌에 덮여 마음이 전도(顚倒)되어 여래의 진신을 보지 못하고 멸도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구경의 열반이 아닌 것이다.

셋째 비유는 태어나기 전부터 눈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해와 달을 보지 못하여 낮과 밤이 어둡고 밝은 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문 자들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진신을 보지 못하므로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하거니와, 여래는 실로 열반에 들지 않았는데도 잘못된 생각으로 이런 마음을 내는 것이다.
넷째 비유는 안개와 구름이 해와 달을 가렸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해와 달이 실제로는 있는 것을 구름이 가렸으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성문 제자들도 이와 같이 번뇌가 지혜의 눈을 덮어 진실한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섯째 비유는 염부제에 해가 졌을 때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흑산(黑山)이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요, 해는 본래 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보지 못함을 해가 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문 제자도 이와 같아서 번뇌의 산에 가리어 여래의 진신을 보지 못하고 멸도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멸도가 아니다.

두 번째는 중생들에게 선(善)을 내게 하려고 열반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여래는 가섭 보살이 3개월 뒤에 선근이 성숙할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향산의 수발타라(須跋陀羅)가 안거를 마치고 부처에게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왕 파순에게 3개월 뒤에 열반에 든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 500명이 3개월을 마치고서 아뇩보리를 낼 것이므로 파순에게 3개월 뒤에 열반에 들 것이라 하였고, 순타와 500 리차(梨車)와 암라과녀가 보리를 이루려는 선근이 성숙할 것이므로 파순에게 3개월 뒤에 열반에 들것이라 선언하였다.

또한 부처가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한 이유는 선을 내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여래가 옛날에 니련선하에서 파순에게 내게는 지금 지혜 있는 제자가 없어서 열반에 들 수 없다고 하였고, 다섯 비구를 위하여 바라나시에서 법륜을 굴리려 한 까닭이다. 또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한량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루빈나가섭의 500제자를 위해서, 사리불과 목건련 등 250비구를 위하여 미묘한 법륜을 굴리려고 마왕 파순에게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열반의 선언은 중생을 불도로 인도하기 위한 부처님의 법륜에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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