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조계종 종책모임인 삼화도량 사무국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삼화도량의 전신은 보선스님 선거대책위원회다. 보선스님 선대위는 구 무량, 무차, 백상도량의 종회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졌다. 보선스님 선대위 소속 종회의원은 35여 명에 달했다. 제34대 총무원장 선거 결과 자승스님은 재임에 성공했고, 보선스님 선대위 중심으로 삼화도량이 창립되었다. 창립 과정에서 무량회와 원융회가 나눠지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창립 당시 종회의원은 25명에 달했으나 제16대 중앙종회 선거 결과 삼화도량은 15명으로 축소되었다. 얼마 후 무차회 회원들이 탈퇴함에 따라 회원은 8명만 남게 되었다. 급기야 삼화도량 회장이 중앙종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삼화도량의 축소 과정은 비유컨대 ‘찬 물에 자라목이 줄어드는 꼴’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필자는 두 가지 화두를 갖게 되었다. 첫째는 조계종의 입법부는 왜 양당체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당에 해당하는 조계종의 종책모임들은 특정 종도집단을 대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필자가 내린 해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래, 조계종은 민주정이 아니라 귀족정이었지!’

샤츠슈나이더는 “정당 없이는 현대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고 단언했고, 피터 마이어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오래된 민주주의나 새로운 민주주의나 정치란 정당정치이다. 달리 말하자면 20세기는 민주주의의 세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당 민주주의의 세기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정당정치’란 무엇일까? 정당(party)의 사전적 의미는 부분을 뜻한다. 다시 말해 정당은 (국민의 특정) 부분을 대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조계종은 전체 종도가 총무원장과 종회의원을 선출하지 않는다. 3소수만이 행정부 수장과 입법부 구성원을 선출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계종의 종책모임은 정당이 아니라 파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르토리는 정당과 파벌의 차이에 이렇게 말했다.

“정당은 전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전체 속의 부분인 반면, 파벌은 단순한 일부 그 자체에 불과하다. 때문에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에게는 부분인 자신뿐 아니라 모두에게 이롭도록 통치하기 위한 불편부당성이 요구된다. 그 점이 정당이 파벌과 다른 점이다. 정당(party)의 기본은 먼저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부분(part)에 충실한 것이다.”

조계종의 종책모임이 종도의 주장에 귀 기울지도 않고 종도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계종 종책모임은 조계종 종도 전체에 봉사하는 부분이 아니라 소수 귀족의 단순한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제34대 총무원장 체제에서 거대 여당에 해당하는 불교광장이 총무원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하지 않는 이유도, 소수 야당인 삼화도량이 비판과 견제를 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는 이유도, 그리하여 입법부, 사법부조차도 총무원장 1인 체제로 귀속된 이유도 그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계종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은 무엇일까?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완벽한 민주제도의 구현, 즉 직선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책모임이 파벌이 아닌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조계종의 귀족정에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수 스님들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내용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위험은 늘 따라다니게 마련이고 최선의 해결책은 자기 자신의 비르투로 극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극복하고 자신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들을 섬멸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면, 그들은 강력하고 확고하며 존중받는 성공한 지도자로 남게 된다.”

《군주론》에는 군주가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이 나온다.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이다. 포르투나(fortuna)는 ‘자기 밖의 운명적 힘’을 뜻하고, 비르투(virtu)는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의미한다.
차기 지도자들은 비르투와 포르투나를 겸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설가 · 전 주간불교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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