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연구한다면서도 종학(宗學)과 학문(學問)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물론 ‘경계’라는 것은 연구를 위한 일종의 ‘방법’으로서 임시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넘어서 안 되는 자동차 중앙분리선과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면서 그것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을 바탕에 두지 않고 넘나든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는 ‘대한불교’라는 명칭에 이어서 ‘○○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저마다 자기 종단의 이름을 쓰고 있다. ‘한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종단명도 있다. 이런 종단들이 모여서 불교종단들이 연합 활동도 하고 있다.

‘종(宗)’이라는 말뜻에 대해 필자 나름의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당나라 학승 규봉 종밀 선사가 내린 정의를 인용하기로 한다. 그는 “해당하는 출가공동체가 가장 궁극적 진리로 삼는 철학적 명제를 종이다”라고 했다. 이런 기준에 의해 불멸 후의 불교 사상을 다섯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상에 집착하는 ‘수상법집종’이고, 둘째는 모두가 공하다고 주장하는 ‘진공무상종’이고, 셋째는 제8아뢰야식 설에 입각한 ‘유식법상종’이고, 넷째는 여래장 사상에 입각한 ‘여래장연기종’이고, 다섯째는 법계연기설을 말하는 ‘원융구덕종’이다.

2.
전통적인 강원에서 각 경전의 ‘현담(玄談)’을 읽어본 사람이면, 이상의 규봉 스님의 설을 익히 보았을 것이다. 규봉의 이런 생각은 현수법장 스님과 청량징관 스님으로 내려오는 소위 화엄 계통의 학승들이 공유하는 전통이다. 이런 전통은 고려를 통하여 의천 스님 당시에도 전래되었고, 다시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 임자도의 난파선을 통해서 또 들어왔다. 임자도에 들어온 수많은 경전이 위에서 말한 5종의 구별에 입각해서 경전에 주석을 단 것이었다.

이런 전통은 전라도 구암사에 주석하셨던 설파상언과 백파긍선 강백들에 의해서 널리 퍼졌고, 다시 순천 조계산 선암사의 함명-침명-경붕-경운 등 소위 4대 강백에 의해 전해졌고, 경운의 강맥을 석전영호 강백이 이었고, 이를 다시 운허용하 강백이 이었고, 이것이 다시 월운해룡 강백에 이어져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들은 행상(行相)이 분명하고 교판(敎判) 엄연하다. 여기에 격외도리를 설하는 <선문염송>이 보태져, 조선 중기 이후 이 땅의 전통이 되어왔다.

일제시기에도 비록 미미하기는 했지만 이런 전통에 서서, 조선총독부의 관제 불교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해방 후, 비록 ‘급조승’들이 승단에 끼어들어 터를 잡았지만, 잿밥에만 관심이 있던 그들은 전통적인 교학과 선학의 중심을 흔들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전통을 운운할 노승들도 나이 들어 입적하시고, 일부 스님들은 결혼해서 대학 강단에 서고, 나머지는 아예 세속으로 돌아가 산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온 산문은 무주공산으로 되어 가고 있다.

적막한 산중에 몇몇 고승들이 남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귀 담아 듣지 않으려 한다. 간화선을 부르짖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상당 법문 하나 제대로 못하는 이들이 선상을 오르내리니, 그들에게 감변이나 염송이나 평창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마 인천 용화사의 송담 선사도 이제 저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3.
개혁종단이 들어서 형식과 제도 측면에서는 변화가 있었지만, 교학이나 수행을 계승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새로운 수행 전통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뜻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저들도 배운 거 없고, 게다가 아직 세월이 일천하다. 그래서 나는 산문이 무주공산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산중에서 출가 승려들 손에 의한 종학은 끝이 났다. 전강을 받은 젊은 강사들이 있지만, 이들이 설 자리가 마땅하지 않다. 그렇다고 초기불교를 연구한 연륜도 짧아서 실제의 종교행위에 쓰이기에는 세월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불교학을 연구하는 대학의 박사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종학을 하는지 학문을 하지는, 아니면 신앙을 하는지 구별이 안 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종학은 신앙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학문은 철저한 이성과 자료와 역사와 논증과 가설 등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은 반드시 언어와 문자를 통해 학문 공동체 속에서 비평과 평가를 받아야 한다. 최근에 일고있는 출가자들 간의 깨달음 이야기도 종학과 학문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놀이는 출가자들이 하게 두고 웬만하면 학자들은 안 끼었으면 좋겠다. 끼더라도 종학인지, 학문인지, 신앙인지, 구별을 해야 할 것이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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