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자 때문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또 보이는 것에 따라 보는 자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말로 나타낸 것이다. 보는 자 때문에 보이는 것이 영향을 입어 달라진다는 것은 대개 다 알 수 있는 일이나 거꾸로도 성립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뛰어난 견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19∼20세기를 나타내는 이론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별 가운데 하나가 날 내려다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 속의 내가 그 별 하나를 올려다본다는 아름다운 시어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맺음하는 김광섭의 시는 노래로 ,연극으로, 그림으로….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주는 예술로 다가왔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불교사상을 아름답게 나타낸 것이라고 해설했지만 그 시 어느 곳에도 불교라는
말이나 불교적인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는 이들이 불교적 우주관, 시공간을 그 안에서 느낀 것이다.

남우성 양지무리 대표가 양지무리를 결성하고 ‘매혹’을 올린다고 찾아왔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겪었던 불교를 표방하는 여러 예술단체 또는 작품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이야기하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를 참고하기를 조언했다. 또 단어를 뺀다고 해서 가르침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으레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기에 잊었는데 가끔 전화도 하고 선원에 찾아와서 차도 마시고 갔다. 지방사찰에 행사가 있어 갔을 때는 일부러 그 사찰로 찾아오기도 하였다. 나하고는 별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하기도 하였고, 나의 위상이 그리 높지도 않기 때문에 걱정(?)도 되었지만 만나는 대로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이번 ‘아버지의 가수’는 일찍부터 살피라는 이야기를 하고 대본도 보내준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아나로그 세대라서 그런지 아직 받아보지 못했다. 아쉬운 면이 있겠지만 그래서 선입견 없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는 대용량의 시대이기에 잘하면 대박이라는 것도 만난다지만 대개의 예술이 그렇듯이 양지무리의 활동도 쉬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 짠하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필요한 조건이리라. 우리 곁에서 벌써 사라져버린 여름날의 매미가 우리 곁에서 노래하려고 무려 7년을 땅 속에서 견딘다하지 않는가? 지금이 2년째인지, 아니면 6년째라 한 해만 더 견디면 되는지, 혹 올해가 7년째는 아닌지...기대해 본다.

아버지의 가수를 보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면 그 마음을 나타냈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라..(그러나)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뭐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법현스님/열린선원 원장,관악산 자운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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