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대(五代) 전촉(前蜀)의 차엽(茶葉)생산과 발전

고대 중국의 장구(長久)한 역사의 강줄기 속에서 오대십국(五代十國 : 907~979) 시기는 비록 72년이란 짧은 세월이지만 남북분열(南北分裂)의 전란(戰亂)이 끊이지 않았던 혼란기(混亂期)요 과도기(過渡期)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당조(唐朝)를 계승하고 송조(宋朝)의 시대를 개막하는 서곡(序曲)이었으며, 당시 급변하는 중국 사회에 있어 역사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변혁(變革)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왕건은 이러한 동탕(動蕩)의 시기에 전촉국(前蜀國 : 907~925)을 건국하였다. 당시 전촉국(前蜀國)의 직할통치구역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섬서성(陝西省)의 남부, 감숙성(甘肅省)의 동남부, 호북성(湖北省)의 서부지역 일대 등을 포함한다. 즉 지금의 중국 서남지역과 서북 일대이다.

왕건(王建)은 보경안민(保境安民 : 국경을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생산 발전에 역점을 둔 정책을 시행하여 국가의 안녕(安寧)은 물론 경제(經濟)·문화(文化)에 있어서도 고도의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마침내 촉국은 오대십국으로 오분사열(五分四裂)된 난세(亂世)에서 ‘천하부국(天下富國)’이라고까지 일컬어지게 되었다.

전촉국의 수도인 성도(成都 : 현 사천성의 수도)는 삼국시대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수도로서 그 위상을 떨쳤으며, 당대(唐代)에도 이미 매우 번영된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기초 위에서 진일보한 발전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성도(成都)는 당시 중국 천하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회지(大都會地)가 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이 멸망한 이후에는 인문(人文)에 통달한 천하의 인재들이 전촉국(前蜀國)의 정권(政權) 아래로 속속 모여 들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그들이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에 끼친 영향도 실로 대단하였다.

왕건은 전촉국(前蜀國)을 건국한 뒤, 위로는 당(唐)나라의 전장(典章)ㆍ예의(禮儀)제도와 문화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아래로는 송나라의 정치ㆍ경제ㆍ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전촉국(前蜀國)의 황제 왕건의 이러한 경제ㆍ문화정책과 그 지역적 특성이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차엽(茶葉)’이다.

중국 사천성(四川省 : 옛날 촉 땅)에 있는 차관(茶館)이나 차장(茶莊)에 가보면, 그 정문과 실내 내부 벽에 걸려 있는 “양자강중수(楊子江中水), 몽산정상차(蒙山頂上茶)”라는 대련 문구가 자주 눈에 띈다. “물은 양자강 중수(양자강의 南零水, 또는 中零泉이라고도 한다.)가 으뜸이요, 차(茶)는 몽산(또는 蒙頂山) 정상의 차가 으뜸이다.”라는 뜻인데, 이 유명한 대련 문구는 중국인들에게 천 년 동안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송(傳誦)되어 내려왔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대(唐代)의 귀족계층들이 서촉(西蜀 : 지금의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성 일대)의 몽정차(蒙頂茶)에 대해 얼마나 극찬했는가를 잘 입증해주고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촉(蜀 : 현재의 성도를 중심으로 한 사천성 일대의 옛 지명) 땅은 본시 차(茶)의 고향이다. 진한(秦漢) 시기에는 여기에서 차를 채취하여 약용(藥用)으로 널리 사용하였고, 삼국시대에는 이미 차를 일반적인 음료로서 널리 애용했다. 물론, 음차(飮茶)의 기원설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아직도 의견들이 분분하여 딱히 “이것이 정설(定說)이다.”고 내세울 만한 확정적인 결론은 아직 없다.

청(淸)나라 초기의 대학자인 고염무(顧炎武)는 중국의 고대 차사(茶事)를 고찰하고 연구한 끝에 자신의 저서《일지록(日知錄)》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진(秦)이 서촉(西蜀)을 취하고 난 뒤, 차를 마시는 일이 시작되었다〔自秦取蜀以後, 始有茗飮之事〕.”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엔 어쩌면 서촉인(지금의 사천성 사람)들의 음차 기원은 우리가 예측하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앞선 선진(先秦 : 진나라 이전의 시대)시기 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사천성(四川省)의 방지(方志)1)로서 동진(東晋) 때 상거(常據)가 지은《화양국지(華陽國志)》에 보면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파촉(巴蜀)2)의 여러 부락 촌장들과 연합하여 상(商)나라의 폭군 주(紂)임금을 칠 때 촉(蜀)의 촌장들이 바친 진공품(進貢品) 중에 향명(香茗)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때가 무려 약 기원전 1058년의 일이다. 이 기록에서 ‘향명(香茗)’이란 바로 “촉(蜀)에서 나는 향기로운 차(茶)”란 뜻이니, 그 용도가 약용(藥用)이든 음용(飮用)이든 간에 음차의 기원은 적어도 사천성 일대에서만큼은 주(周)나라 이전인 상(商)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여튼, 이 기록들은 사천성(四川省) 사람들의 음차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당나라 중기 무렵, 육우(陸羽)가《다경(茶經)》을 저술하여 세상에 널리 음차(飮茶)를 선양(宣揚)한 후로는 품명(品茗 : 차를 음미하며 마시는 행위, 또는 품평하며 마시는 행위)의 풍습(風習)이 점차 고관대작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다. 만당(晩唐)의 희종(僖宗) 황제 때에는 차의 종식(種植)이 서남(西南) 및 강남(江南) 각 지역에서 일정한 규모를 갖추고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차의 품종 또한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매우 많은 차의 품종 가운데서도 촉(蜀)땅에서 나는 차(茶)를 으뜸으로 치는데, 그중에서도 ‘선차(仙茶)’로 불려지는 ‘몽정차(蒙頂茶)’를 천하제일차(天下第一茶)로 꼽았다. 청나라 때 조의(趙懿)도 그가 지은《몽정차설(蒙頂茶說)》 중에서 몽정차를 가리켜 ‘선차(仙茶)’라고 극찬하는 시를 남겼다. 현재 몽산의 정상에는 ‘선차고향(仙茶故鄕)’이라고 크게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많은 다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당시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방법은 오늘날 끓는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는 방법〔泡茶法〕과는 전혀 달랐다. 먼저 입자가 곱게 찻잎을 빻은 후, 끓는 물주전자(혹은 물솥) 속에 가루차〔末茶〕를 넣고, 살짝 끓여 내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전다(煎茶)’ 혹은 ‘자다(煮茶)’라고 한다. ‘전다(煎茶)’와 ‘자다(煮茶)’는 같은 뜻의 말로 “차를 달이다.” 혹은 “차를 끓이다.”는 말이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선비들 사이에서는 유아(儒雅)한 귀족들만의 ‘품차(品茶) 놀이’가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투차(鬪茶)’이다. 투차란 귀족들끼리 모여 서로의 차를 다려내어 돌아가며 맛을 보며 차 맛과 차를 우려내는 기술 등을 서로 겨루는 놀이로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3) 이들은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의 월요(越窯)에서 생산되는 ‘청자다기(靑瓷茶器)’에다 촉(蜀) 땅에서 생산되는 차(茶)를 담아내어 마시는 것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차의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차는 여전히 고관대작이나 부유층의 사치스런 향수품(享受品)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차의 가격을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며, 더욱이 민간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차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차관(茶館)과 같은 음차(飮茶) 장소는 아예 없었던 것이다.

왕건이 서촉(西蜀)을 통치한 후로는 다엽(茶葉)의 생산이 대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사기(史記)》의 기록을 보면, 왕건은 당나라 말엽에 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天節度使 : 현 四川省의 省長)와 성도윤(成都尹 : 현 省都市長)에 부임하였을 때 “한 차례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바친 공차(貢茶)·베(布) 등이 십만(十萬)이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방관이 조정(朝廷)에다 조공(朝貢)한 차엽(茶葉)의 수량 중 당대(唐代)에서는 가장 많은 양이다. 후에 당 소종(昭宗)은 검남절도사(현, 사천성)였던 왕건을 다시 ‘촉왕(蜀王)’에 봉하였다.

후량(後粱)의 주전충(朱全忠)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왕건은 곧 사천성 일대를 영토로 하는 ‘촉국(蜀國)’을 건국하고 스스로 황제(皇帝)임을 칭하였다. 이로써 오대십국(五代十國) 중 하나인 전촉(前蜀)이 건국된다. 오대십국(五代十國) 기간 동안에 촉 땅(사천성)에는 촉국(蜀國)이 두 차례나 건국된다. 그래서 왕건이 세운 촉국을 전촉(前蜀), 후에 맹지상(孟知祥)이 세운 촉국을 후촉(後蜀)이라고 한다.

전촉국(前蜀國)의 황제로 즉위한 왕건은 먼저 차엽(茶葉) 등의 물자를 이용하여 서부 장족(藏族 : 티베트족) 및 강족(羌族)들과 전마(戰馬)를 교환하는 ‘다마무역(茶馬貿易)’을 통해 방대한 기병부대(騎兵部隊)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차엽(茶葉) 생산을 촉진(促進)·발전시켜 경제를 부흥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막강한 군사력을 튼튼히 다지는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경제ㆍ국방의 정책을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왕건은 최초로 차엽(茶葉)·식염(食鹽)을 서부지역 장족·강족의 전마(戰馬)와 바꾸는 ‘국가적 차원의 다마호시(茶馬互市)’를 열어 송대(宋代)의 정식적(제도적)인 다마무역 정착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대(唐代)에 시작했던 한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은 한시적(限時的)인 동시에 국부적(局部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임시성에 불과한 것이었지 ‘국가적(國家的) 차원’에서 이루어진 정식(正式)의 다마무역(茶馬貿易)은 아니었다.4) 이 때, 이루어진 다마호시(茶馬互市 : 혹은 茶馬貿易)는 당대(唐代)의 다마호시와 함께 훗날, 송대(宋代)의 다마무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로써 다마무역은 그야말로 송조(宋朝)의 막대한 재정(財政)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국가의 대정(大政)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마차(馬茶)’나 ‘변차(邊茶)’로 불리는 차(茶)는 바로 당시에 오로지 강장(羌藏)지구의 말(馬)과 교환하는 데만 쓰기 위해 생산하던 긴압차(緊壓茶 : 압축한 차) - 겉보기에는 호남에서 생산되는 일명 ‘천냥차’5)와 흡사함 - 품종(品種)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왕건은 스스로 차를 매우 즐겨 마셨다. 왕건의 총비(寵妃)인 화예(花蕊) 부인이 지은 《궁사(宮詞)》중에 “…매번 올 때마다 가마꾼에게 차를 다리도록 시켰네.”라고 묘사한 대목은 왕건이 어느 정도 차를 즐겼는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왕건은 음차(飮茶)를 민간에 널리 보급하는 것을 힘써 장려하기도 한 다인(茶人)이었다. 그는 자신의 중신(重臣)인 모문석(毛文錫)으로 하여금 특별히《다보(茶譜)》를 지어 차(茶) 마시기를 널리 전파하도록 명령하였다.

차엽(茶葉)의 생산과 무역이 흥성(興盛)함에 따라 왕건은 각다(榷茶 : 차를 전매하는 것)의 법을 세우고, 모든 차엽(茶葉) 생산(生産)과 무역(貿易)을 전부 국가에서 독점하여 관리하도록 명하였다. 송(宋)나라에 이르러서는 ‘각다사(榷茶司)’를 특별히 설치하고 이 일을 관리하였는데, 이러한 제도의 기본틀은 대체로 전촉(前蜀)의 각다(榷茶)를 본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나중에는 다마사(茶馬司)에서 마정(馬政)과 더불어 차정(茶政)도 모두 관리하였다. - 차엽의 생산량이 많아지자, 마침내 백성들도 차(茶)의 향기와 차의 갖가지 묘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도에는 드디어 ‘민간(民間) 다방(茶房)’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성도의 차관(茶館)은 그야말로 천 년(千年) 세월의 강물 위를 유유히 떠 있는 한가로운 유람선처럼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주) -----
1) 방지(方志) : 혹은 지방지(地方志)라고도 하며, 중앙 왕조가 아닌 제후국이나 각 지방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2) 파촉(巴蜀): 파(巴)는 지금의 중경(重慶), 촉(蜀)은 성도(成都)의 고대 지명이다.
3) 이 투차(鬪茶) 놀이는 훗날 송대(宋代)에 와서 그야말로 최고조(最高潮)에 달하는데, 특히 복건성(福建省)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4) 계간《다담(茶談)》 1998년 봄호에 게재된 졸고 〈명청시대(明淸時代)의 한ㆍ장다마무역(漢藏茶馬貿易)〉및 2002년 여름호에 게재된 졸고〈초기 한ㆍ장다마무역의 역사적 배경〉 참조.
5) 원래 공식명칭은 ‘화전(花磚)’이고 과거 역사상에서는 ‘화권(花卷)’이라고 하는데, 마치 돗자리를 둘둘 말아서 압축된 모양이 마치 돌기둥과도 같다. 그 무게가 천(千) 냥이나 나간다고 해서 ‘천냥차’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천냥차’로 많이 알려져 있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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