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파리 테러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IS가 이번에는 터키 이스탄불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 극단적인 이슬람원리주의 단체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세상은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테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라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제 여행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극단적인 과격 단체와 무슬림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슬람교는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로 무려 13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는 큰 종교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그냥 평범한 종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슬람교에 생소하다보니 뉴스로 접하는 무슬림을 전체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IS, 시리아내전, 파리 테러, 멀게는 미국의 9·11 테러 등. 이런 뉴스를 통해서 이슬람교를 접하다 보니 무슬림을 다소 광신적이고, 그래서 위험한 종교인들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란으로 여행을 떠나서 알게 된 무슬림은 매우 친절하고 자비심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자신의 종교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친절’이라고 했는데, 이란에서 만난 무슬림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접한 무슬림에 대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뉴스가 나와도 무슬림과 일부 이슬람 과격 단체를 동일시해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슬람교에 대한 인연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다’ 하는 시각으로 무슬림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 <내 이름은 칸>(인도, 2010)은 이러한 편견을 겨냥한 영화입니다.

<내 이름은 칸>은 9·11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 만연한 무슬림 공포감에 대한 반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은 누구나 알다시피 기독교인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고, 기독교인이 주류를 이루며, 미국 문화형성의 상당부분은 유태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무슬림에게 이래저래 우호적인 환경은 아닙니다. 설상가상으로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면서 미국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혐오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로 인식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 일침을 놓았습니다. 칸이라는 무슬림 청년을 통해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렸습니다.

집단 군무와 노래가 버무려진 기존 틀을 깨뜨렸다는 평을 듣는 인도영화 <내 이름은 칸>에서 칸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런 칸에 대해 어머니는 헌신적이었습니다. 칸이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순수한 마음과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도록 특별한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칸은 동생이 있는 미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칸(샤룩 칸)은 만디라(까졸)라고 하는 인도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만디라에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9·11테러가 일어나고, 갑자기 삶이 바뀌었습니다. 9·11테러로 인해 미국인들 사이엔 급격하게 무슬림 혐오증이 확산됐고, 미국 내 무슬림들의 삶은 고달파졌습니다. 칸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칸은 의붓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성을 따라 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아들은 무슬림으로 오해받고 학교에서 왕따 당하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해 결국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한 만디라는 자신이 무슬림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모든 사람들이 칸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걸 알게끔 대통령이 직접 칸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면 이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 칸을 쫓아냈습니다.

영화는 칸이 아내의 요구대로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칸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과 깊은 신앙심을 표현하면서 진실한 무슬림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칸은 다른 사람의 슬픔, 기쁨 이런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은 떨어지지만 엄마가 어린 시절 심어준 신념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엄마는 착한 행동을 하면 착한 사람이고, 나쁜 행동을 하면 나쁜 사람이지, 무슬림이라고 착한 사람이고 힌두교인이라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칸은 자기 종교에 대해서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도인 여자와 결혼했고, 기독교를 믿는 아줌마와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9·11테러로 미국인의 이슬람에 대한 혐오증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다른 이슬람교 신자들이 히잡을 벗고, 수염을 깎고, 예배시간을 슬쩍 넘어갈 때도 칸은 카펫을 깔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슬람식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종교에 대한 신념이 투철했습니다.

그러나 칸은 모스크에서 다른 사람을 선동하는 무슬림에게는 ‘사탄’이라고 거침없이 비난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편 가르기와 비난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사탄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에게는 그가 무슬림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가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슬림 칸은 매우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칸은 마침내 대통령을 만나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물론 아내 또한 다시 칸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9·11테러 직후 이슬람교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 공항에서, 대중 집회장에서 무슬림이란 이유로 경찰에게 잡혀가 며칠씩 감옥에 갇히기도 하던 매우 살벌하던 시기에 칸은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분노심을 잠재웠습니다. 칸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소통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보다는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는 종교 이전에 인간의 자비심과 선량한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종교 이전에 인간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영화 <내 이름은 칸>을 통해서 보면 우리는 무슬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이라는 모토 아래 자기 종교 이외의 종교를 이교도로 여기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IS와 같은 일부 과격 단체에 국한된 것인데 일부를 전부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 또한 우리 불교인과 마찬가지로 ‘한 명의 무고한 죽음은 전 인류의 죽음’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정도로 살생을 금기시하는 그런 자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계가 좀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다른 종교인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IS와 같은 집단이 발붙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영화는 무슬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을 적대시한다면 지구는 결코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할 때 지구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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