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의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 바 사랑하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보호하는 마음이니라.” - 《증일아함경》 제29 <고락품> 제10

흔히 인간을 일컬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성취를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 요즘 중·고등학교에서 빈번했던 속칭 ‘왕따’ 문제가 초등학교로까지 번지고 있다고 한다. ‘왕따’란 집단 따돌림의 비속어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월세 산다는 가난을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현상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 인간의 속성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될 때 푸른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빛나는 법이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외부적 힘으로, 또는 억압적 수단에 의해 깰 수 있는 자격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더욱이 인성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소년 단계에서 관계를 해치는 ‘왕따’ 현상이 빚어진다는 건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이러한 점에서 앞의 부처님 말씀은 바람직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신분과 우월한 두뇌와 막강한 재력에 의해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이러한 속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가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낼 때 미움과 원한이 있을 수 없고 갈등과 대립이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의 ‘왕따’문제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공업(共業)이다.

공업이란 저마다 선악(善惡)의 업을 공동으로 짓고, 공동으로 고락(苦樂)의 인과응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모든 생명은 평화를 바란다. 인간뿐만 아니라 뭇짐승, 소나무 한 그루의 자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평화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므로 폭력으로 이를 해친다면 그 업보는 엄중하다. 존재의 의미를 파손하는 행태거니와 상의상관의 질서와 조화를 망가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업의 의미를 각별히 새겼으면 한다.

법진 스님 | 본지 발행인·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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