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불교가 5세기 초, 19대 눌지왕(417∼457) 때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를 통하여 무명(無名)의 전도자들에 의해서 전해진 듯하다.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해 준 것은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인 것 같은데, 경북 선산지역[신라 고구려의 국경지대]을 거점으로 하여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제대로 전교된 것 같지는 않고, 6세기 초 법흥왕(法興王) 8년(521)에 양(梁)의 무제(武帝)가 보낸 불승 원표(元表)에 의해서 비로소 불교가 왕실에 정식으로 전해졌다. 법흥왕은 왕경(王京) 내의 천경림(天鏡林)을 베어서 절을 세움으로서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23대 법흥왕 14년(527년) 왕의 총신인 이차돈(異次頓)이 왕의 흥불 의도를 실현시킬 목적으로 창사(創寺) 준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차돈의 죽음으로 불교가 곧 공인되지는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하여 국왕과 귀족 세력 간의 모종의 타협이 있었고, 법흥왕 22년(535년)부터 그간 중단되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로써 이 때 불교가 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 수용에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그것은 4세기에 이미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 통치체제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신라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연맹체적인 정치체제하에서 신라의 왕권이 아주 미약하였고, 그 결과 귀족들의 반대를 억누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약화하며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려는 정책들을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공인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신라를 포함하여 삼국의 국왕들이 모두 불교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공통의 이유는 불교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에 부응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삼국은 각각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왕의 부족적 자율성을 해체하여 국가 전체를 강력한 왕권 밑에서 하나의 단위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왕들이 생각하기에 각 부족의 독자적 전통이나 신앙을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 전체를 보편적인 전통과 신앙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일을 하기에는, 불교가 가장 좋은 도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불교를 이용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다.1) 그 결과 불교의 사상이나 이론을 현실 정치이념으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첫째, 대표적인 예로 ‘전륜성왕’이 있다.2) 신라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아들의 이름을 동륜과 금륜이라 하였다.

둘째, 진종의식이 있다. 진종의식은 신라의 왕들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정치이론이다. 왕실은 자기네가 부처와 같은 크샤트리아 계급[찰제리종(刹帝利種), 참된 종족]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종은 부처님의 혈족(血族)이며, 왕실은 석가족으로 여기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혈통의 신성함을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즉 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신라왕실을 석가족과 동일시함을 통하여 국왕을 부처와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진종이 이후 진골(眞骨)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으로서 부처님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고, 진평왕의 형제는 백반(伯飯), 국반(國飯)으로서 부처님의 삼촌들과 동일하며, 진평왕의 왕비는 마야(摩耶)부인으로 부처님의 어머니와 이름을 같이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법흥왕부터 진덕여왕에 이르는 시기의 모든 국왕들은 모두 불교와 관련되는 왕호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3)

샛째, 불국토사상이 있다. 불국토 사상은 현재의 국토가 오랜 과거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현재도 불교의 호법신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특히 신라에서 활발하였다. 그 이유는 불교의 수용과 국가의 체제를 동시에 이루어야 했으며, 또한 삼국전쟁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있던 신라가,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불법의 가호를 받으려 하였고, 또 이미 받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려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진평왕 11년에(589) 수나라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 온 신라 불교학의 선구자 원광(圓光 532~630, 혹은 555~638)은 남중국의 진나라에 가서 《열반경》, 《섭대승론》 등을 배우고 귀국하여 《여래장경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를 지어 새로운 불교 지식을 신라에 전했다. 귀국 후 점찰법을 통해 운문산 가서사(嘉栖寺)에서 대중들을 교화 시킬 때,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은 세속오계를 주었다. 세속오계는 출가자로서의 윤리와 세속인으로서의 윤리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다르게 본다면,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전쟁에 임해서 물러서지 말라’는 등의 오계는 원광의 불교에 국가의식이 깊숙이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이 점은 오계의 준거가 되었다는 보살십중계에 유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도 명백하다.

원광 이후 신라불교학을 크게 발전시킨 이는 자장(慈藏, 590?∼658?)이다. 자장은 당에서 7년 간의 유학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한다. 귀국하자마자 국가는 그에게 전국의 승려를 통어할 ‘대국통(大國統)’의 직위를 준다. 이후 그는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섭대승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이후 통도사(通度寺)를 647년 창건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들어 계율을 널리 설하였기 때문에, 계행을 고취시켜 불교교단의 위상을 높였다 하여 호법보살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계율이 원광의 오계에 준거가 되었던 범망보살계(梵網菩薩戒)였다.

이 무렵 신라는 10인 가운데 8, 9인이 계를 받고 불교를 믿을 정도로 흥성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 왕실의 적극적인 불교 흥륭책과 귀족 출신 고승들의 호국적인 활동은, 신라불교가 왕권의 강화와 국가의 발전 그리고 삼국통일이라는 세속적 목적을 위해 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국가의 세속적 목적과 불교의 출세간적 가치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 또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추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상적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미증유의 시대에 원효(元曉, 617~686)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계속)

주) -----
1) 고구려와 백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강도에 있어서는 신라에 뒤진다.
2) 전륜성왕은 고대 인도의 전기(傳記)에 나오는 이상적 제왕. 전륜왕(轉輪王) 또는 윤왕(輪王)이라고도 한다. 이 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늘의 차륜(車輪)이 나타나고, 왕은 그 선도(先導)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 세계를 평정한다고 여기는 데서 이 이름이 생겼다. 산스크리트의 차크라바르틴(cakravartin)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뜻한다. 불전(佛典)에서는 이 왕이 윤보(輪寶)·백상보(白象寶)·감마보(紺馬寶) 등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부처와 같은 ‘삼십이상(三十二相 : 32가지의 신체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고, 세속세계의 주인으로서 진리계(眞理界)의 제왕인 부처님에 비유되는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실제로 석존(釋尊)이 탄생 때에 출가(出家)하면 부처가 되고, 속세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을 받았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 전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륜성왕은 석존보다 뒤의 인도통일제국의 아쇼카 제왕에 대한 이미지가 투영(投影)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3) 이 점 신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도 마찬가지이다. 백제의 성왕은 전륜성왕으로, 고구려의 위덕왕은 불경의 위덕불을 표방한다.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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