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문(旌門)과 복호(復戶)

《명종실록》 10년 3월 29일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속삼강행실도》 〈녹연요부(祿連療父)〉. 거창에 사는 이녹연이 9살에 아비가 모진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베어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좋아지고, 정려문이 세워졌다는 내용이다.
예조가 효자(孝子)로 양양(襄陽)에 사는 충순위(忠順衛) 김수영(金壽永),【부모가 돌아가자 몹시 슬퍼하여 뼈만 남았었지만 채소와 과일도 먹지 않고 3년간 죽만 먹었으며, 또 스스로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지어 자기 손으로 좌우 무릎에 자자(刺字)하였다.】 간성(杆城)에 사는 교생(校生) 황필현(黃弼賢),【아버지가 병이 나자 마음을 다해 의원과 약품을 구하고, 돌아간 후에는 시묘(侍墓) 살며 3년간 죽만 먹었다.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얻게 되자 단지(斷指)하여 약에 타서 먹였는데 어머니의 병이 바로 나았다.】 서부(西部)에 사는 악생(樂生) 김수장(金壽長),【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이 나자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정성을 다해 빌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중병을 얻자 단지했는데 병이 바로 나았다.】 남부(南部)에 사는 사노(私奴) 조명중(趙命仲),【아버지가 병이 위독하여 기절(氣絶)하게 되자 단지했는데 조금 후에 소생했다.】 남부에 사는 참봉(參奉) 김대관(金大觀),【형제간에 우애로워 같이 한집에서 살았고, 아버지가 중병을 얻자 단지했는데 병이 바로 나았다.】 평해(平海)에 사는 고(故) 선무랑(宣務郞) 정칭(鄭偁)의 첩인 양녀(良女) 운서(雲瑞),【지아비가 죽자 30여 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고 강포한 자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까 염려하여 언제나 자는 방에다 칼을 준비해 두었으며, 정결하게 제물을 마련하여 슬프게 울며 몸소 제사 지내고, 문 밖에 나다니지 않았다.】 동부(東部)에 사는 생원(生員) 홍윤(洪潤)의 아내 이씨(李氏)【지아비가 병을 얻었는데 의원의 말이 ‘생사람의 고기를 약으로 먹여야 된다.’ 하자, 즉시 칼로 발가락을 끊어 자신이 갈아서 술에 타 먹였는데 지아비의 병이 조금 나았다.】 등을 입계(入啓)하니, 정문(旌門)하고 복호(復戶)하도록 하였다.

정문은 충신(忠臣)이나 효자(孝子)·열녀(烈女)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마을이나 집 어귀에 세운 붉은 문을 말한다. 작설(綽楔), 혹은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홍살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붉은 색은 신분이나 행위가 특별히 높거나 우뚝하여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고대에는 왕의 거처나 귀족 중에서도 특별히 기려야 할 일이 있을 경우, 예컨대 왕을 대신하여 죽었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웠을 때 내려지던 것이다. 정(旌)은 깃발로, 먼 데서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세웠다. 대개 마을 어귀[려(閭)]에 세우기 때문에 정려문이라고 한다. 때로는 정려문을 하사하게 된 연유와 내용을 상세히 적은 정려기(旌閭記)를 비문에 새기고 집을 지어 비바람에 젖지 않게 했다. 이런 집을 정려각(旌閭閣)이라고 한다.

정문은 범접할 수 없는 귀한 것이기에 일반 평민이나 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정문이 조선시대에 오면 위 《명종실록》에서 보듯 노비나 첩의 딸 같은 천민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하사되고 있다. 정문의 보편화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보다는 평민이나 천민, 특히 여자들에게 자주 내려졌다. 여기에서 복호(復戶)의 의미가 되새겨진다.

복호는 집[戶]에 부과되는 조세(租稅)나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부역은 변방을 지키거나, 성을 쌓는 등의 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노동력이 있는 사람―이들을 장정(壯丁)이라고 했다―은 늙어 쓸모없어지기 전까지 부역의 의무를 지고 살아야만 하였다. 부역은 평민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부역을 면제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부담이 일반 부세보다도 더 컸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에게 복호는 그야말로 성은(聖恩)이었던 것이다. 대개 정문은 복호와 함께 내려졌다. 가문의 영광에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2. 할고(割股)와 단지(斷旨)

위의 《명종실록》 기사에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대저 아들이 부모에게 있어서나 아내가 지아비에게 있어서나 의리는 똑같은 것이다. 만일 크게 무도한 사람이 아니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즈음에 당해서는 심정이 절박해지는 법이므로 반드시 해보지 않는 일 없이 모두 해 보려고 하여, 자신의 신체(身體) 발부(髮膚)를 생각하거나 아낄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할고(割股)하거나 단지(斷旨)하거나 하는 것이 모두 다 그다지 귀중할 것은 없는 것이고, 또한 아들 된 사람이나 아내 된 사람으로서는 자기 스스로가 그만둘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말세에 거짓이 늘어나 풍속이 야박해지고 인심이 교활하여졌으니, 그 가운데에는 본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명예를 구하기 위해 한 자도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강상(綱常)의 변이 잇달아 종이 상전을 죽이기도 하고 아내가 지아비를 살해하기도 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는데, 시골 부녀자와 천한 노예로서 오히려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일로 또한 천리가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임금이 그 고유한 천리(天理)에 따라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 지성으로 위에서 인도하고 통솔해 간다면 우리의 도(道)를 잘 따를 것이다. 어찌 대면하여 가르치고 귀에 대고 일러주기를 기다리겠는가.

부모나 남편이 사경을 헤매게 되면 자식이나 아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려드는 건 천리이기에 할고와 단지도 기꺼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할고란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것이고 단지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자르는 것이다. 허벅지 살을 배어내어 부모에게 먹이고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먹였다. 그러면 효부 열녀로 칭송되어 정려를 하사받고 복호의 은전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러자 정려와 복호를 노리고 할고 단지하는 자들이 생겼다. 사관의 말처럼 거짓과 교활함이 판을 치는 말세가 되었으니 말 해 무엇 하겠는가. 기실 할고와 단지는 유교(儒敎)의 가르침과는 상반된다. 유교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지엄하였다. 한(漢)나라 때 왕양(王陽)이란 사람이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되었다. 부임하는 길에 험하기로 유명한 구절판(九折阪)을 지나게 되었는데, 왕양은 몸이라도 상하면 부모님이 슬퍼한다고 하며 자사자리를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왕양은 효자로 명성을 드날렸다. 유교는 길이 무서워 나라의 명령도 거부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칭송할 정도로 신체 보존을 지상명령으로 받들었다. 그렇다면 할고 단지는 완벽한 불효가 아닐 수 없다. 더 기막힌 것은 열녀로 포상되는 경우이다. 《중종실록》 11년 6월 9일 기사를 보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의 양녀(良女) 석비(石非)는 재인(才人) 김부 응수리(金府應水里)의 아내인데, 시부모를 공경을 다해서 섬기고, 제 지아비가 앓으니 밤낮으로 약수발을 들어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지아비가 죽자 석비가 “욕되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지아비를 따라서 죽겠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관찰사 허굉(許硡)이 장문(狀聞)하니, 정문(旌門)과 복호(復戶)를 명하였다.

대개 열녀는 석비처럼 죽은 남편을 따라 자결하거나,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켰을 때 내려졌다. 자결이 열녀의 징표가 되자 지아비를 잃은 지어미에게 자결은 의무가 되었다. 실제로 과부가 된 여자나 며느리에게 자결하라는 압력은 음으로 양으로 매우 컸다. 심하면 밥을 굶겨 죽게 해놓고 열녀로 상신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다보니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조정에서 어사를 파견하였다.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김명민의 파견이 바로 자결한 여인의 열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폐단을 당시의 학자나 조정 관료들이 몰랐을 리 없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는 이렇게 말했다.

효도로써 사람을 뽑으면 용감한 자는 할고(割股)를 하고 비겁한 자는 여묘(廬墓)를 할 것이며, 청렴으로써 사람을 뽑으면 초라한 수레와 파리한 말을 타고 궂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을 것이니, 이는 덕행(德行)에서 생기는 폐단입니다.1)

여묘란 상주(喪主)가 무덤에 초막을 짓고 살며 3년간 무덤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 흔히 시묘(侍墓)라고도 한다. 이 기간 동안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자신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대개 여묘살이 3년이 지나면 상복은 너덜너덜해지고 몸은 비쩍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된다. 자기 학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효자 소리가 높았다. 그러다보니 여묘살이 끝에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말한다.

할고에 대한 견해는 선유(先儒)들이 다 논의하였습니다. “절박함이 극도에 달해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서 취할 수 없게 되어 혹 부득이하게 권도(權道)로 처리를 하는 수가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이 외에 다시 다른 도리가 없다면 차라리 제 몸을 손상해서라도 어버이의 목숨을 구제하는 것 또한 자식 된 자의 지극히 애통한 심정이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이것을 효도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주자는 단지 “효도에 가깝다.”고만 하고 지선(止善)이라고는 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체로 일이 어쩔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만족할 만한 좋은 도리가 없으면 부득이 차선을 택하여 따르는 것이 이른바 권도인데, 그런 시점에서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살펴서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혹 괴이하고 편벽되어 도를 어지럽히는 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2)

권도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원칙을 뜻하는 경(經)과 상대되는 임기응변을 가리킨다. 예컨대 남녀가 서로 몸을 닿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예(禮)의 원칙으로 경(經)이라면 물에 빠진 형수의 손을 잡아 구해내는 것은 임기응변의 권(權)으로 용납되는 것이다. 이런 권도로써 할고와 단지를 긍정한 것인데…….

퇴계 선생의 지적처럼 그 부작용과 폐해를 지적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 내내 할고와 단지는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성군(聖君)으로 알고 있는 정조(正祖)는 할고와 단지한 자를 더 많이 찾아내라고 채근하고 있다. 《정조실록》 10년 2월 15일 기사에는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성과 같이 넓은 지역에서 한성부가 아뢴 효자와 열녀가 어찌 여섯 명밖에 안된단 말인가? 다시 찾아보게 하라.”는 정조의 명령이 실려 있다. 정조의 치세 기간 내내 효자 열녀를 품신하는 장계는 간단없이 올라온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실록》 14년 1월 27일 기사에, 단지한 70세 노인과 할고한 세 어린 아이에 대한 충청도 관찰사의 장계(狀啓)에 대해 정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하고 있다.

효자와 열녀에 대해 보고한 것을 보면 대부분 내용이 비슷비슷한 관계로, 담당 부서가 표창의 등급을 정할 때 취사선택이 곤란하다. 그러나 부여의 고 현령 김광악은, 집에서는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였고, 조정에서는 신하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특이한 사실과 탁월한 행실이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기다리지 않고도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특별히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회인에 사는 세 어린이의 효성 또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역시 관찰사로 하여금 먹을 것을 넉넉하게 주도록 하라.

정조 시대에는 일흔 살의 할아버지가 아니면 정문이 하사되기 어렵고, 어린 아이들의 할고조차 그저 먹을 것이나 내려주어도 될 만큼 할고 단지하는 자들이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정조는 이런 정도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왕위에 오른 지 21년째에는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제작한다. 《오륜행실도》는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와, 중종(中宗) 때 삼강(三綱)에 들지 못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간의 도리를 편찬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합하여 만든 것이다. 얼마간의 첨삭이 더해졌지만 내용에 큰 변화는 없다.

3. 삼강오륜(三綱五倫), 말하는 자와 행하는 자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首位)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경륜(經綸)의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입니다.……효자·충신·열녀로서 우뚝이 높아서 기술할 만한 자를 각각 100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형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詩)를 붙이었습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서문 중 일부이다. 이 서문을 쓴 사람은 권채(權採)이다. 권채는 《삼강행실도》 뿐만 아니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서문도 쓸 정도로 세종의 각별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그는 집현전 학자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오르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40살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정승도 맡아 놓은 자리였을 것이다. 이런 권채가 곤장을 맞고 파면되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권채의 나이 29살 때의 일이다.

그는 일찍이 덕금(德金)이란 노비를 첩으로 삼았었는데 부인 정씨에 의해 덕금이 온갖 학대를 받고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된 일이 우연히 발각된다. 애초 덕금이 병든 할머니를 문안하고자 권채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권채가 거절하였다. 그러자 몰래 할머니에게 다녀온 덕금을 정씨가 똥을 먹이고 침으로 항문을 찌르며 온갖 잔학한 짓을 다하여 거의 죽게 된 것이다. 이 일의 전말이 밝혀지고 권채에게 장 80에 삭탈관직과 추방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대해 《세종실록》 9년 9월 4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지신사 정흠지(鄭欽之)에게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종과 주인의 사이는 그 관계가 같습니다. 지금 권채가 계집종을 학대 곤욕시킨 죄로써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시니, 신(臣)은 강상(綱常)의 문란함이 여기서부터 시작될까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흠지(欽之)가 이 말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계집종일지라도 이미 첩이 되었으면 마땅히 첩으로써 이를 대우해야 될 것이며, 그 아내도 또한 마땅히 가장(家長)의 첩으로써 이를 대우해야 될 것인데, 그의 잔인 포학함이 이 정도니 어떻게 그를 용서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흠지가 대답하기를, “권채의 죄는 가벼운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이에 고쳐 명하여 다만 그 관직만 파면시키게 하였다.

허조의 주장은 권채와 덕금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므로 권채에게 죄를 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세종의 처분은 이미 첩으로 삼았으면 부부의 일이므로 그에 합당한 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어찌되었든 권채는 곤장은 면하고 직책만 삭탈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등용된다. 그의 부인은 곤장을 맞는 대신 벌금을 내는 것으로 무마되고, 덕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권채는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사람이다. 허조, 정흠지, 세종대왕, 그리고 정조대왕을 지나 조선 시대 내내, 임금과 사대부의 입에서는 삼강이며 오륜이 말 되어졌다. 고귀한 분들에게서 고결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책이 편찬되고, 가장 중요한 교과로 가르쳐졌다. 그리고 노력에 걸맞게 조선엔 무수히 많은 효자, 효부, 열녀가 배출되었다. 곳곳에 붉은 색 정려가 세워지고 아름다운 행적이 기려졌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난한 집 자식들과 힘없는 부녀자들은 허벅지 살을 베고 목을 맸다.

주) -----
《성호사설》 권10 〈동파논과시(東坡論科試)〉
《퇴계선생문집》 권14 〈이숙헌(李叔獻) 이(珥)에게 답하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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