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가까이 가는 네 가지 일은 첫째,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일, 둘째,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일, 셋째, 마음을 두어 생각함, 넷째, 여법하게 행을 닦는 일다. 이번 호에는 그 둘째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일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생들이 부지런히 법을 들으면 신근(信根)을 구족하게 되며, 신근을 얻으므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행하여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에 이르게 된다고 하여,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열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법에 대한 믿음 곧, 신근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행 정진할 수 있고, 정진해야 불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요한 신근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법을 들음’에서 시작된다. 《대승기신론》에서도 “능히 이 법을 이해한다면 신근을 일으키게 된다”고 했다. 이 신근이 중생들의 근기를 성숙시키며, 신근을 얻으려면 법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법을 잘 들은 인연으로 대열반에 간다고 하여 다음의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첫째는 장자와 외아들의 비유이다. 어떤 장자가 장사를 떠나는 외아들에게 간곡히 일렀다. 다른 지방에 가 물건을 구하여 무역을 하면서 도로가 통하고 막힌 데를 일러주고, 경계하기를, “만일 기생을 만나더라도 애착하여 빠지지 말라. 만약 미색에 빠지면 몸을 망치고 생명이 위태로워지며, 재물도 잃게 되느니라. 또한 나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몸과 마음이 안락해지고 재물을 많이 얻게 되는 것이다. 보살들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연설함도 이와 같아서 도를 구하는 데 험하고 통하는 길을 알려주니 이를 잘 듣기 때문에 나쁜 짓을 여의고 선한 법을 구족하게 된다. 이는 모두 법을 잘 들은 인연으로 대열반에 들어감을 비유한 것이다.

둘째는 밝은 거울의 비유이다. 밝은 거울로 사람의 얼굴을 비추면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법을 듣는 거울도 누구나 이 법을 들은 거울에 비추기만 하면 선한 일 악한 일이 분명히 나타나 가리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법을 들은 인연으로 대열반에 가까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술 취한 코끼리 비유이다. 술 취한 코끼리가 미친 듯이 포악하여 만나는 대로 살해하는데, 조련사가 굵은 쇠갈고리로 정수리를 찍어 조정하면 이내 길들여져 사나운 성질이 없어지듯이 모든 중생들도 탐욕과 어리석음에 취하여 악행을 하려고할 때 보살이 법의 갈고리로 찍어서 머물게 하면 다시는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전일하게 법을 들으면 법의 눈이 뜨여 대열반에 가까이 가게 된다. 경에서도 전일하게 경을 들으면 오개(五蓋)를 여의고 칠각분(七覺分)을 얻는다고 하였듯이, 법을 잘 들은 인연으로 두려움과 고통이 있는 생사의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법의 눈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법의 눈이 없는 이요, 둘째는 눈이 하나인 사람이며, 셋째는 눈이 둘인 사람이다. 법의 눈이 없는 이는 항상 법을 뜨지 못하는 사람이고, 한 눈 있는 이는 잠깐은 법을 듣더라도 마음이 전일하지 않는 이요, 두 눈이 있는 이는 전심으로 법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하는 이이다.

셋째는 마음을 두어 생각하므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생에게 일어나는 오욕락, 전도심, 괴로움, 보리의 인연, 영원하다는 법 등을 잘 생각해 그 실체를 알아서 온갖 번뇌를 끊어야 한다. 먼저 중생들은 오욕락에 얽혀있다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 오근에서 오경을 인연하여 끊임없이 오욕락이 일어나므로 탐·진·치가 일어난다. 이러한 오욕락이 인연에 의해 일어남을 항생 생각해야 이로부터 해탈을 얻을 수 있다. 다음으로 마음에 두어 생각할 일은 네 가지 전도(顚倒)이다. 중생들은 우리가 항상하고, 즐겁고, 진실한 나이고, 청정하다는 네 가지 뒤바뀐 생각에 빠져 있다. 이 전도심을 마음에 두어 생각함으로써 모든 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안락하지 않고 부정한 줄을 알게 되어 전도심을 끊고 열반에 나아가게 된다.

또한 온갖 법이 네 가지 모습이 있음을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나는 모습, 늙는 모습, 병드는 모습, 없어지는 모습이다. 이 네 가지 모습이 모든 중생들로부터 수다원에 이르는 중생들에게 고뇌를 가져오거니와, 마음으로 가두어 잘 생각하면 비록 이 네 가지를 만나더라도 고통이 생기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는 모든 선법이 마음을 두어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법을 오랫동안 듣더라도 마음을 두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뇩보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중생들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법을 마음에 두어 잘 생각하면 이 인연으로 불·법·승 삼보가 변역(變易)하지 않음을 믿고 공경하게 된다.

넷째는 여법한 수행이다. 중생이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항상 마음에 두어 생각하면, 여법(如法)한 수행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법한 수행이란 일체법이 공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무상하며, 안락하지 않고, 무아이며 부정한 줄을 보았으므로, 계율을 범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여법한 수행을 하면 첫째 열반을 알고, 둘째 불성을 알며, 셋째 여래의 모습을 알고, 넷째 법의 모습을 알며, 다섯째 승가의 모습을 알고, 여섯째 실상을 알며, 일곱째 공함을 안다.

열반을 안다는 것은 부처의 열반, 범부의 열반, 이승의 열반을 안다는 것이다. 부처의 열반이란 번뇌가 다함[盡], 선한 성품, 진실함[實], 참됨[眞], 항상함, 안락함, 나[我], 청정함의 여덟 가지를 앎이다. 범부의 열반이란 해탈, 선한 성품, 진실하지 않음, 참되지 않음, 무상함, 안락하지 않음, 나를 알지 못함, 부정함의 여덟이다. 이승의 열반이란 번뇌를 끊어서 해탈이라 하지만 아뇩보리를 얻지 못하여 진실하다고 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으므로 참되지 않고, 오는 세상에 아뇩보리를 얻을 것이므로 항상함이 없고, 무루한 팔성도를 얻었으므로 안락하고 청정하다고 한다.

불성을 안다는 것은 불성의 항상함, 청정함, 진실함, 선함, 장차 볼 수 있음[當見], 참됨의 여섯 가지를 안다는 것이고, 여기에 증득할 만함[可證]을 합하여 일곱 가지를 말하기도 한다. 나머지의 여래의 모습 내지 공한 성품을 보는 것까지 모두 여법한 수행으로 얻어진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ikiw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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