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생의 길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다수의 성자들이 내 주변과 사회에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위대한 선지식에 대한 기대는 희망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그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해 나가는 길이 자정이고 혁신이며 강도 높은 정진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94년도 개혁불사 시 종단이 개혁다운 개혁을 해야만 불자는 물론이고 시민사회로부터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 선지식의 출현이 가능하다고 누차 주장한바 있다.

불자들은 일상에서 자비구현 또는 구세대비라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문구들의 의미에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깊이와 무게감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흔히 사회경제적으로나 정신적, 정서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내가 가진 것을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을 자비라고 여긴다. 사전도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이라 풀어 놓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 철학적 관점에 따라 의미의 차원과 깊이에 어느 정도의 다름은 있겠지만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대체로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인들이 일상에서 너무나 흔히 사용하기에 ‘자비’라는 언어가 함용하고 있는 깊은 의미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혜와 더불어서 자비의 완성자는 부처님이시며, 범부는 신심과 수행, 깨달음에 대한 정도에 따라 자비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차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수많은 개개인들의 삶이 얽히고설켜 세상사를 이룬다. 자비는 그러한 인간들의 세상사 속에서 실천되고 구현된다. 그런데 여기 금강경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하자.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여아석위가리왕(如我昔爲歌利王) 할절신체(割截身體) 아어이시(我於爾時)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산스크리트어 번역본은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여, 일찍이 어떤 악왕이 나의 몸과 수족(手足)에서 살을 도려낸 그때에도 나에게는 자기라는 생각도, 살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개체라는 생각도, 개인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다시 또 생각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이기영 저 ‘금강경 | 산스크리트어 번역’ p.94)

부처님께오서 보다 쉬운 설명을 위해 예로 든 위 전생담의 일화에서와 같이 “몸과 수족(手足)에서 살을 도려”내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인류사에서는 수도 없이 많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처럼 충격적인 사건들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 자식이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유산배분이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내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신앙이나 사상이 다르다거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명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이 의심스러울 만큼 극악무도한 악행에 관한 이야기가 가정의 안방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며 사람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하여 필자는 위에 인용한 부처님의 말씀을 이렇게 수용한다. 구도자라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토록 잔인한 일이 발생하게 된 현상의 배경과 거대 사회구조 모두에까지 당당히 맞서서 세상을 제도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구도자인 너(나) 자신부터 ‘상(相)’을 버리고 스스로 대 자유인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평소 경험하지 못하였던 극악한 경계에 맞닥뜨렸을 때 현응 스님의 견해처럼 과연 불교를 “잘 이해”하는 선에서 흔들림 없는 무량한 자비행이 가능할까, 그러한 경계에서 구세대비자로서의 손색없는 역할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수불 스님은 1월 17일자 <불교신문>을 통해 “토론 제안에 대해서는 종단 차원의 공식적인 논쟁이면 언제든지 환영지만 비공식적인 자리는 거부한다.”고 밝혔었다. 수불 스님은 종단의 고위급 교역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교육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현응 스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하기에 두 분의 토론 자리는 수불 스님이나 현응 스님, 당사자 두 분 가운데 아무라도 한 분이 나서서 마련한다고 토론의 격이 떨어진다거나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그것을 두고 ‘비공식적’이라고 폄훼할 불자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하여간 수불 스님께서 “종단 차원”이라는 단서를 달았으니, 조계종 총무원이나 교육원이 주최하고 종단 산하기구가 주관하여 여러 기관, 단체의 협찬 속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내에서 토론이 이루어진다면 여법성이 구족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본다. 또 아니면, 토론의 내용이 내용인 만큼 간화선 국제학술회의를 추진하고 있는 동국대학교의 종학연구소 측에서 추진해도 좋을 것이다.

일반 불자도 아닌 출가자가 진리를 논하고 자비를 행함에 있어서 공식 비공식을 차별하고 장소와 격식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와 격식은 어쩌면 군더더기에 불과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 종단의 주체적이고 빠른 주도를 기대한다. 시간을 끌거나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니다. 법을 논하는 자리보다 더 자비롭고 자색광명이 방광하는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불교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활을 전변(轉變)시키는 종교다. 할절신체 현상이 난무하고 매순간 삶의 고통이 연속인 우리 사회와, 크나큰 혼란과 어려움 속에 방향을 잃어버린 한국불교 전반에 무엇이 지혜와 자비의 완성에 이르는 길인지, 걸출한 두 분 스님께서 대좌해서 대중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를 기대한다.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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