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사 전경

영산불교에서 본 불교의 ‘깨달음’ 논쟁과 무상정등정각의 길
-현응스님의‘이해하는 깨달음’ 및 수불스님의 ‘간화선 옹호’주장을 보고

Ⅰ. ‘이해하는 깨달음’은 부처님 가르침 도외시한 발상

- 현응 스님의 주장요지와 반론요지
1. ‘이해하는 깨달음’은 불교를 격하시키는 비불교적 발상

불교의 깨달음은‘이해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증오(證俉)의 깨달음입니다. 현응스님의 주장은, 생사해탈을 위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이고 완성된 수행체계로 볼 수 있는 계(戒)·정(定)·혜(慧) 삼학체계로서의 팔정도를 포함하여 사선(四禪)·팔정(八定) 등 경전의 수많은 선정·삼매관련 내용을 도외시하는 비불교적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높은 정신적 통일상태(心一境性)인 선정·삼매의 한 경계로서, 이를 통해 우주본성을 보고, 생사해탈을 이루며, 종국적으로는 우주본체(본성, 공)와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 과정입니다. 이렇게 심오하고 차원 높은 불교의 깨달음을 어찌하여 한낱‘이해하는 깨달음’으로 격하시키고, 결과적으로 불교를 학문적 차원으로만 전락시키는지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부처님의 깨달음은 ‘논리적 사유’에 의한 것이 아닌 불신과 계합하는 차원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 당신과 붓다의 경지에 간 대성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선정 단계를 거쳐 깨달았다는 경전의 말씀은 사실로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불신을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대적정삼매라는 최고수준의 삼매를 통해 부처님의 영체가 절대계에 있는 부처님의 불신과 계합하는 특별한 차원입니다. 이는《금강경》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으로서 우주본체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완성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4선 8정 같은 선정 차원도 아닐진대, 하물며 ‘논리적 사유’에 의한 것이라든가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폄훼하는 엄청난 불경입니다.

3. 생사해탈은‘관념적 해탈’이 아니라‘실제적 해탈’로서 불교의 수행목표

‘이해하는 깨달음’은 생사해탈을 실제로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생사해탈을 실재성으로부터의 관념적 해탈로 보고 있습니다. 생사해탈이란 육도윤회 하는 고통의 생과 사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해탈·적멸계에서 생사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를 단순히 관념적으로만 보는 것은 불교의 수행목표를 망각하고 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Ⅱ. ‘간화선 중심의 선불교’는‘부처님중심 불교’로 거듭나길
-수불 스님의‘간화선 부흥이 한국불교의 미래’주장에 대한 제언

1. 선불교는‘부처님 없는 불교’에서‘부처님 중심 불교’로 가야

선불교는 부처님의 실존에 대한 믿음이 없이‘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합니다. 이런 논리로, 마음을 깨치면 곧 부처(直指人心, 見性成佛)라고 합니다. 이는 부처님의 실체를 모르고 불교수행의 본질을 간과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심교(心敎)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견성의 수준은 우주본체인 공을 잠시 체험하는 경계로서 아라한에도 못 미치는 경지입니다. 아라한 너머 보살의 해인삼매와 붓다의 대적정삼매가 있습니다. 어찌 아라한도 못되는 경지를 붓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절대계에 무량광 빛의 불신으로 계시는 인격체이지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업장을 소멸해 주시고 기도도 들어주시는 부처님을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공양도 기도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2. 선불교는‘윤회주체인 인간영체 없는 허무주의 불교’에서 탈피하길

선불교에서는 무아(無我)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인간의 본체이며 윤회의 주체인 인간 영체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무아는 현상계의 존재인 ‘나의 실체 없음’을 말한 것이지 불멸하는 나의 본체인 영체까지 없다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라는 생각’이 멸진된 그 ‘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대승의《열반경》에서 많이도 강조하고 있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에서의 아(我)는 바로 적멸세계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영체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이유가 바로 무아를 왜곡해서 불교가‘ 나 주인공’없는 허무주의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윤회주체가 없다면 불교의 윤회·해탈론이 무용지물이 되어 불교를 믿을 이유도 스님이 될 이유도 없습니다.

3. 선불교의 간화선 수행은 경전에 없는 수행

법- ‘견성중심’에서 ‘선정삼매중심’으로 가길
선불교의 중심 수행법인 간화선은 분명한 경전적 근거가 없는 수행법입니다. 화두를 들려면 선문답 같은 화두가 아니라 성스러운 부처님의 존호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간화선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하기 전에 간화선이 과연 확실한 경전적 근거가 있는 정법의 수행법인지부터 먼저 깊이 있게 검토해 봐야할 것입니다. 팔정도 칭명염불이 정법입니다. 또한 간화선은 견성만을 주장하는데, 바른 선정삼매를 통하지 않고는 올바른 깨달음과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4. 사후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 올바른 윤회 해탈론 확립하길

선불교에서는 윤회·해탈세계 등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옥이나 극락도 마음의 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법상에서 자신 있게 사후세계의 존재를 역설하고 삼악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사자후하는 선불교의 큰스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5. 경전 소홀, 복덕수행 소홀, 계율 철저기풍 미확립 풍조 개선하길

선불교에서는 경전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조사어록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큰 잘못입니다. 경전을 열심히 독송해야 됩니다. 지혜와 복덕은 해탈의 양날개인데 선불교에서는 복덕 닦는 일을 소홀히 하며,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기풍이 확립되어 있지 못합니다. 계율은 목숨같이 지켜야 합니다. 스님들의 범계소식이 더이상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Ⅲ. 부처님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으로 가는 바른 길
1. 부처님의 실존과 실체를 믿는 부처님중심 불교라야

(1) 실존하시는 부처님을 믿고 귀의해야
부처님께서는 무아속 절대계에 무량광 빛의 인격체로 여여히 계십니다. ‘경전의 왕’이라 불리는《법화경》과《화엄경》은 부처님의 실존과 위대하신 실체를 잘도 그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명확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 넘도록 우리 불교계는 부처님의 실존과 위대한 실체에 눈을 감고 있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금광명최승왕경》《열반경》등 여러 경론의 불신론도 부처님의 실존을 말해줍니다. 부처님의 실존과 위대한 실체를 모르는 불교는 더 이상 불교라 할 수 없습니다.《법화경》의 백미(白眉)는 구원본불(久遠本佛)의 사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기겁 전에 성불하셨고, 그 때부터 불신(佛身)으로 상주하시면서, 또는 사바세계를 오가시면서 수많은 중생을 교화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주하시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불신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불의 법·보·화 삼신에 대해 간략히 설명드리자면, 법신불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우주본체인 공과 100% 계합한 우주적 광명지체(光明智體)입니다. 보신불은 중심불로서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영원히 멸도하지 않는 무량광 빛의 인격체로서 중생의 업장을 소멸시켜 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중생구제의 본불이십니다. 화신불은 보신불이 수많은 수행자를 제도하기 위해 삼매력으로 만들어낸 부처님의 몸입니다. 화신불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실존을 철저히 믿고 귀의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전지하시고 만능자재하신 부처님의 구원력에 의존해야
우주법왕이신 부처님은 전지하시고 만능자재하십니다. 우주본체인 공(空)과 완전히 합일되어 우주의 주(主)가 되신 부처님(보신불)께서는 공(空)이 가진 무한한 질료와 정보와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창조주적 능력을 가지십니다. 부처님의 무한한 능력은 불신의 무량광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무량광 한 줄기마다 특별한 역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억종의 무량광이 갖고 있는 능력은 무한합니다.
무량광은 한량없이 방사해도 끝이 없고 일체의 지혜와 복덕, 자재한 위신력과 신통력을 지닌 불가사의한 빛입니다. 부처님만이 중생의 지중한 업장을 소멸시켜 삼악도에서 구해주실 수 있습니다.
붓다를 길러내고 적멸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우주 저쪽까지 던져버릴 수 있는 초천문학적인 힘이 있으십니다.
세계 어느 종교의 교주도 불신이 없기 때문에 이런 능력이 없어 진정한 구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부처님의 법신불인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모든 붓다님들의 보신불이 들어가면 하나의 우주적 구원주체가 되어 중생구제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불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진정한 구원의 종교입니다. 앞으로 불교는 부처님 실존 중심으로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수행도 자력기반-타력중심의 칭명염불 수행으로 과감히 전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우주적 구원력을 믿고 의지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인간본체이며 윤회주체인 영체에 저장된 업장을 소멸해야

영체는 인간의 본체인 동시에 연기와 윤회와 해탈의 주체입니다. 인간의 4개의 영체 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영체(4번)는 육체와 영체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나머지 3영체(1·2·3번)는 불멸의 윤회주체입니다. 이 중 1번 영체가 인간의 본체입니다. 업을 지으면 모두 이 영체에 저장이 됩니다. 중생은 영체에 태산 같은 업장을 짊어지고 있는 반면, 복덕의 선근보따리는 무척 작습니다. 수행이란 바로 이 영체의 업을 정화하고 선근공덕의 보따리를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 영체에 저장되어 있는 악업을 소멸하는 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기존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무아론을 잘못 해석하여 인간 본체인 영체마저 없다고 하면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하는가 하면, 윤회의 주체가 필요 없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아뢰야식은 업을 저장할 수 없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업을 저장하려면 입체적인 영적 실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윤회의 주체는 불멸이어야 하는데 식은 찰나생·찰나멸하므로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이 어떻게 지옥, 하늘을 갈 수 있겠습니까?  무아라 해서 나의 본체인 영체가 없다면 윤회와 해탈도, 불보살의 존재도 근거를 잃게 됩니다

3. 불보살이 되는 팔정도 칭명염불 수행에 매진해야

(1)불교의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갖고, 항상 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慧學-정견, 정사유)
(2)5계 10선 등 불교의 여러 계율을 목숨 같이 지켜야 합니다(戒學-정어, 정업, 정명)
(3)칭명염불로 부처님의 가피 입고 바른 선정에 들어야 합니다(定學-정정진, 정념, 정정)
칭명염불은 불보살이 되는‘자력기반 타력중심’의 유일한 수행법입니다. 지금 세계불교의 자력중심 수행으로는 아라한이 한계이고, 절대로 보살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정토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①영체분리 및 4중죄 소멸 ②정토에 해탈신(아기보살) 만드는 일 ③영체의 변녀성남 ④극렬한 마장 퇴치 ⑤가까운 친족이 악도에 없도록 천도 등이 필수요건인데, 이 작업은 오직 부처님만이 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명염불은 부처님의 성호를 소리 내어 간절히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념으로 염불수행에 정진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바른 선정·삼매에 들 수 있고 부처님회상을 만나 부처님의 가피로 불보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마장을 막고 해탈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참스승을 만나야

높은 해탈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참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치성한 마장을 막아주고 떼어줄 스승이 꼭 필요합니다. 특히 천마, 축생마인 용신·이매망량, 원결영가의 빙의가 문제입니다. 혼자서는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5. 부모·조상님께 효도하고 자비이타행으로 선근공덕을 쌓아야

효는 불교의 중심사상으로서 진정한 효는 천도재를 통해 사후에 부모님의 영체가 받고 있는 지옥·축생의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효행과 더불어 자비이타행으로 선근공덕을 많이 쌓아야 됩니다. 보살행을 생활화하여 선근 보따리를 열심히 키워나가야 수행의 진전이 빠르고 부처님의 가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산불교대학 교수 혜운 합장



조계종의 ‘깨달음’ 논쟁에 대하여

1. 들어가면서

지금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 21세기 붓다의 메아리

조계종의 교육원장인 현응스님이 최근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 깨달음은 이해(understanding)’라는 주장이 계기가 되었다.

일부 불교학자들이 동의하기도 하고, 일부 스님들이 반론을 개진하면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사실 이번의 깨달음 논쟁은 깨달음 자체를 현응 스님이 잘못 정의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재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니까야에서 말씀하셨고, 역대의 많은 제종(諸宗)의 선지식들도 깨달음이란 언설과 논리적 사유를 떠난 것이라는 것을 누누이 언급해왔기 때문이다.

교육 수장인 현응스님이 선종의 종지를 표방하는 조계종이 돈오견성의 선풍을 종풍으로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 증오(證俉)가 아닌 ‘이해’를 깨달음이라고 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2. 두가지 쟁점에 대해

쟁점의 하나는 ‘깨달음이 이해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이 논쟁의 배경이 되는 문제로서,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현재의 조계종 불교로는 현시대의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첫번째,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
현응스님은 깨달음이란 ‘이해’라고 정의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중국의 선종 초기에도 깨달음은 ‘이해하는 깨달음’이었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론하는 수불스님은 이해는 알음알이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버려야 할 대상이다. 그래야 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불교중흥의 문제에 대해.
현응스님이 진단하기에, 지금 조계종의 주류는 참선수행 중심의 산중불교, 깨달음 지상주의이다. 이런 불교로는 중생들의 구체적 삶의 문제를 외면하게 되고 또 사회적 요청, 예를 들면 생명·환경문제 등 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그의 진단에는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화두참선 수행 중심의 불교로는 변화하는 다양한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여 불교는 후퇴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통찰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현응스님은 선불교의 어려운 ‘깨달음을 포기하고’, 대신에 ‘이해’(연기성 및 공성에 대한 이해)만 가지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스님들, 특히 체계적 반론을 제기한 수불스님은 반대 방향으로 즉 ‘깨달음을 위해’ 화두참선법을 선양하여 대중화하는 길이 불교중흥의 바른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이 논쟁을 바라보는 바른 입장

이 논쟁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2가지 문제가 시사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이 봉착한 근본적인 문제가, 그리고 한국불교의 현주소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바른 깨달음의 정의에 대해

깨달음이 연기성 혹은 공성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현응스님의 주장은 사실 근거가 없다. 이 ‘이해’로는 중생을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로 이끌 수 없다. 그가 발제문에서 팔리어 율장의 ‘마하박가’를 인용하면서 최초에 5비구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대화를 통해서 즉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수불스님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조계종에서 추구하는 깨달음 즉 견성(見性)은‘마음’을 깨치는 것이고 본래면목을 확철대오하는 것이다. 육조 혜능의 가풍이고 성철스님이 선양한바 있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이 바로 조계종의 수행목표다. 그러나 견성과 돈오가 깨달음이 아닌 것은 아니나 우려 또한 없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8정도를 행하지 않으면 정법이라 할 수 없으며, 8정도가 있는 곳에 해탈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하셨다. 간화선 수행에는 8정도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보기에 돈오견성은 불교수행 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견성은 공체험을 하는 것이고 성불로 가는 먼 도정의 출발점이다. 반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일체종지)는 보살의 지위를 넘어 부처님이 증득하는 깨달음으로서, 이 둘은 선정과 지혜의 깊이에서 천양지차다.
다른 관점에서 말해보면 견성은 법신(法身, 이 법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법신이 아니다)을 증득하는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보신(報身)을 증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쟁을 통해서 불교의 최종목표로서의 바람직한 깨달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둘째, 불교중흥의 문제에 대해우리는 불교중흥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무엇이 바람직한 불교인가?’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①대승교학을 외면해온 조계종 - ‘견성=성불’의 잘못된 가르침
수불스님 그리고 조계종은 한사코‘견성(공체험)=성불’이라고 주장한다.
마음 · 공을 깨닫는 것을 성불로 삼게 되면 ‘마음’이 불교의 최종 종착지가 되어 불교는 심교(心敎)로 전락되어 버린다. 마음만이 참나이고 삼계는 공화(空華)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부처’가 되어 부처님의 존재도 설 자리를 잃고, 유심(唯心)이 정토(淨土)라 서방극락정토도 설자리가 없다. 그리고 육도윤회의 고구정녕한 부처님 말씀도 희석되어 버린다. 이‘견성=성불’은 매우 위험한 오해이고 부처님 정설이 아니다.
조계종은 이 종지에 비추어 대승경전의 부처님교설을 외면해왔다. 그러지 않으면 선종의 수행목표(공체험-법신 증득)와 대승교학(보신의 실존-성불)과의 괴리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증의 관점에서 대승불교는‘지혜’의 면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불신’의 면에서는 보신(報身)을, ‘해탈’의 면에서는 무주처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야경〉의 6바라밀과〈화엄경〉의 10바라밀의 수행공덕이 이를 증득하는 데 필요한 자량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보신을 구족한 부처님이 계시고 해탈열반의 적멸세계를 적극 긍정하는 게 대승불교의 진면목이다.
한국불교가 ‘마음이 부처’라는 선종의 종파적 입장에 갇히지 않고 대승불교의 철학과 이념을 계승하여 부처님의 실존을 긍정하고 바라밀행을 적극 선양하며 청정한 계율의 준수와 바른 선정(禪定)의 수습을 전통으로 삼는다면 훨씬 힘있고 생명력 넘치는 불교가 되어 시대를 선도할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시대에 부응하고 사회를 선도하는 불교를 만들어낼 것인가?  결국 ‘선종’의 왜소화되고 왜곡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②이번 논쟁에서 불교중흥의 방법에 대해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은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한다.
현응스님은 ‘깨달음’ 대신에 연기성에 대한 ‘이해’만으로 삶의 현장에서 바라밀행을 실천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첫째, 깨달음 즉 무명의 타파는 12연기에서 보는 것처럼 생사의 소멸이고 해탈이다. 어떤 명분이라도 깨달음이라는 불교적 가치는 포기될 수 없다.
둘째, 깨달음을 포기하는 것은 조계종이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응스님은 조계종이 선종으로서의 종파적 테두리를 깨버리고 ‘바라밀행’을 종지로 하는 새로운 불교로 나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바라밀행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성불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게다가 현응스님은 ‘돈오(頓悟)의 조계선풍으로 제종(諸宗)을 섭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있다. 이는 바라밀행의 종지와 상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응 스님의 방향은 매우 불분명하고 또 모순적이다. 수불스님은 반대로 ‘인류 최고의 정신문화 유산’인 화두참선 수행을 대중화하는 것이 불교증흥의 길이라고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선종의 병폐를 다시 반복하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불교중흥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견성’하면 ‘성불’인데 다시 바라밀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선종은 자력 수행의 길 외에 중생을 구제하는 다양한 방편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고 선도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볼 때 불교중흥의 방법을 어떻게 모색하든지 간에 기존 한국불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고, 새로운 불교의 요청이 절실해진다.

4. 영산불교가 제시하는 대안 - 우주적 진리의 신불교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는 ‘마음이 부처’ 혹은 ‘견성성불’이라는 틀에 갇혀 대승불교의 이념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 신불교 영산불교는 대승불교의 완성이고 새로운 불교의 출발이다. 불교사의 모든 긍정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중생구제를 위한 법재(法財)와 방편을 구족하고 있다.
우리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성불을 보신의 증득으로 보며, 그런 불신을 구족한 부처님이 계심을 선언한다. 이제 선종 중심의 편협한 기존불교 대신에 부처님의 실존을 신행과 수행과 교학의 중심으로 놓는, 힘 있고 생명력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불교를 내놓는다.
이 논쟁을 통해 제기된 깨달음과 불교중흥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붓다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영산불교의 칭명염불 속에 있고, 왜소화된 한국불교를 중흥하여 시대를 선도하는 불교로 쇄신하는 방법이 영산불교의 철학 속에 모두 들어 있다.

1) 부처님의 실존
부처님의 실존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이다.〈법화경〉,〈화엄경〉등 여러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고, 다양한 경론에서 불신(佛身)을 삼신론(三身論)으로 교학적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가 부처님의 실존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은 ‘마음이 부처’라는 선종의 편협하고 그릇된 기치가 한국불교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육조단경 참회품에 나오는 자성삼신론은 선(禪)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정법의 견지에서는 결단코 잘못된 견해이다. 법신을 증득하면 보신과 화신을 구족하게 된다는 것은 잘못된 사견이다.
부처님은 청정법신 원만보신 천백억화신의 삼신을 구족하시며, 그 위신력은〈법화경〉〈유마경〉〈화엄경〉에 그려져 있는 이상으로 우주적 힘을 구유하고 계신다.

2) 윤회와 해탈의 주체- 영혼체
지금의 불교는 부처님의 무아설을 매우 그릇되게 이해해서 윤회의 주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면 어떻게 윤회하며 어떻게 수행하여 해탈하겠는가? 우리는 이 주체를 영혼체라고 부르고 편의상 1번, 2번, 3번, 4번 영체 네개가 겹쳐져 있다고 설명한다. 1,2,3번 영체는 뭉쳐서 다니는 우리의 본체이다. 4번 영체는 육신이 생길 때 1,2,3번 영체와 육신을 접합하는 역할을 하는 일시적인 영체이다. 이 영혼체가 나의 본체로서 업을 짓고 업을 받는 주체가 되어 윤회한다. 영산불교에서는 기존의 무아윤회론을 대체하는 영혼체 윤회론을 제창한 바 있다.

3) 6바라밀 수행과 8정도 칭명염불

부처님께서 제시해주신 8정도의 실천수행과 6바라밀의 수행 또한 우리의 중요한 수행 덕목이다. 영산불교는 8정도 칭명염불을 수행방법으로 내놓는다. 이는 출가와 재가가 함께 하고, 수행과 생활이 서로 이어져 있다.
개개인을 참다운 해탈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고,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타력에 기반한 칭명염불 수행에 의지해야 한다. 칭명염불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명호를 부르는 수행으로 가장 정통적인 수행방법이다. 현지사의 칭명염불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8정도와 함께 수행하는‘8정도 칭명염불’이고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궁극적인 수행법이고 가장 깊은 삼매인 대적정삼매를 지향한다.

영산불교 현지사 대원 스님



신불교(영산불교)의 우주적 진리 입장에서 바라본 ‘깨달음 논쟁’

1. 서론

2015. 9. 4일 현응 스님이 세종문화회관에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주제로 기조 강연한 내용 중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에 대해 수불 스님과 전국선원수좌회 등에서 반론을 제기하였으며, 홍창성 교수(美미네소타대 철학과)는 ‘이해하는 깨달음이 올바른 견해’라는 논지를 밝혔습니다.
본고(本稿)에서는 ‘현응 스님과 수불 스님, 그리고 현응 스님의 글에 대해 비판하신 분들의 깨달음에 대한 견해’에 대해 진정한 깨달음은 무엇이고 어느 수준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正覺)은 소위 견성(見性)과 무엇이 다른지? 추가적으로 불신론(佛身論), 인간 영혼의 실체(영혼체)와 윤회의 주체, 그리고 무아(無我)에 대해 신불교(영산불교)의 우주적 진리의 입장에서 중점적으로 논하겠습니다.
(간화선의 문제점과 ‘조계종 명칭 변경, 종지의 현대적 구현’ 등은 논외로 하였습니다)

2. 현응 스님이 밝힌 깨달음에 대한 견해

현응 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견해는 첫째,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으로 높은 정신세계가 아니다. 둘째, 부처님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셋째, 깨달음도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했다(이해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화해 갔다). 넷째, 선정과 삼매로서 마음을 닦아 깨달은 마음으로 만드는 것은 각종 화학적 재료를 섞거나 변용하여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이다. 다섯째, 현대인의 깨달음은 ‘연기(緣起)와 공(空)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독서와 사유, 그리고 스마트 폰 검색으로 사띠(sati) 기능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다. 여섯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깨달음 기준을 잘못 설정한 까닭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3. 수불 스님의 반론

수불 스님은〈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의 소책자에서 현응 스님의 글을 비판하고 있는 바 첫째,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은 없고,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
둘째, 깨달음은 불이법(不二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二法)에 속하기 때문에 범주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셋째, ‘깨달음’과‘ 시대적인 진화’는 서로 범주가 다르며 깨달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중도불이법(中道不二法)인데 비해 시대적인 진화는 전후가 면면히 상속되고 생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대이법(相對二法)의 세계다. 넷째, ‘화두와 간화선’에 대해서는 본칙공안(本則公案)중 하나를 결택하여 철두철미하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함으로써 참 의심을 불러 일으켜 돈오(頓悟)하게 하는 수행법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4. 여러 비판 의견들

전국선원수좌회는 ‘부처님께서 니까야에서 수없이 반복적으로 설하고 있는 선정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간과한 주장이며 역대 조사(祖師)가 고구정녕하게 설파하신 수증의 종지를 훼손했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서재영 박사(불광연구원 상임연구원)는 월간〈고경〉1월호에 기고한 '깨달음에 대한 두 가지 해석'에서 ‘잘 이해함’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8식설(아뢰야식)과 같은 마음에 대한 교설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성철 스님의 입장에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5. 조사(祖師)의 깨달음인 견성(見性)과 부처님의 무상정등정각(正覺) 차이

견성(見性)은 성불(成佛)이 아니고 이제 붓다로 가는 여정(旅程)의 시작입니다. 화두 참구를 통해 얻은 견성은 우주본체인 공(空), 마음자리를 잠깐 본 것(본체의 一面만)으로 공부의 끝인 구경(究竟)이 아니라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적멸세계로 가는 진짜공부의 시작이며, 선불교 간화선으로 증득할 수 있고, 세계적인 종교(힌두교, 자이나교, 기독교, 유교, 유대교, 이슬람교,도교)로도 깨달음(見性)을 얻을 수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에 의하지 않은 깨달음은 올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계율과 선정(禪定)을 통해서 지혜의 문이 열리고 열반(일체의 고통이 멸해지고 윤회를 벗어난)을 수반하는 진리의 깨달음(아라한)이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정법(正法)에서의 깨달음은 선정삼매(禪定三昧)를 필수로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조사(祖師)들의 깨달음인 견성(見性)과는 천지현격(天地懸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법계 최초로 불과(佛果)를 증하신 최초불(《법화경》〈여래수량품〉)로서 소승의 선정(禪定)으로 도(道)를 이룬 것이 아니고 대적정삼매(大寂靜三昧)에 들어 불과(佛果)를 다시 증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무상정등정각(正覺)은 깨치면서 당신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하나로 계합됩니다. 《화엄경》의 말씀대로 당신의 불신(佛身)인 무량광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방광을 하면 삼천대천세계가 육종진동을 하면서 하늘에서는 꽃비를 내리고 또 삼계의 세주(世主)들이 부처님께 와서 예배를 드리며 부처님께서는 우주법계를 대상으로 설법을 하십니다. 이렇듯 부처님은 절대하신 우주 주(The Lord of the universe)이시고 절대적인 힘은 당신의 몸(佛身)인 무량광에서 나옵니다.

6. 불신론(佛身論_ 부처님의 실존)

영산불교의 불신론(佛身論)은 삼신(三身_법·보·화신)에 대해《금강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의 내용에 더하여 피부에 와 닿게 붓다의 삼신설(三身說)을 명확히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무아 속 절대계(현대물리학적으로 11차원)에 여여히 계신다고 선언하고있습니다.

부처님 실존의 경전적 근거는《법화경》〈여래수량품〉, 《화엄경》, 《금강경》, 《열반경》에 기술되어 있으며, 우리 부처님께서는 천상천하에 가장 위대하신 삼계 대법왕이시고 지존(天上天下無如佛)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법계 최초로 우주본체인 공(空)과 완전히 합일하여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되시어 우주법계의 주인(Lord)이 되셨습니다. 즉 당신의 몸(佛身)은 불가사의한 무량광(無量光: 자연의 법칙에 의해생기는 블랙홀처럼 우주법계를 하나의 점으로 초극미로 압축할 때에 생기는 빛의 본원광으로서 광도와 강도·온도·속도 등 무한의 힘을 발휘)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적으로 비유하면 부처님의 무량광은 아주 짧고 강한 파장이므로 무한의 온도와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고, 무한의 온도와 강한 파장으로 우주법계를 관통하고 있으며 공(空)에서 나온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바, 부처님(무량광)과 인간(나我의 순수본성인 불성佛性)은 빛과 빛의 상속으로 하나(一)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창조주는 없지만 창조주적 능력을 지닌 우주주(The Lord of the universe) 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空)의 절대성을 마음대로 활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32상 80종호를 갖춘 지혜 자비 신통 복덕을 넘어 불가능이 없으신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계(三界)를 집어 던질 수 있는 힘과 정업불면인 중생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으며(중생의 共業力과 空의 동력으로 우주가 탄생하므로 우주를 생성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힘을 가져야 중생의 업장을 소멸할 수 있음) 극무간지옥 갈 중생의 업장도 소멸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의 무한한 힘을 다른 외도의 수장들과 비교하면 클리어 요가를 완성한 파탄잘리(Patanjali)나 예수, 그리스도 바바지(2000년 이상 죽지 않고 사는 히말라야 초인)가 낼 수 있는에너지는 10억 와트로 번개가 내는 순간온도의 대략 1/30의 수준이고, 물질 1g을 에너지로 전환(E = mc2) 하였을 때 8만 3천 세대의 월간 전력을 조달하는데 10억 와트는 대략 이 수준의 1/90정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온 우주법계의 질량을 모두 에너지化하실 수 있으므로 비교 자체가 불경(不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법계의 모든 외도(外道)들이 일시에 합하여 공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순간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위신력과 중생의 지중한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능력, 부처님 가피에 의해서만이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것도 우주본체와 계합되었기에 우주법계의 이치(理致)와 원리(原理)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물리법칙으로도 논증 됨) 강조하고자 합니다.

7. 인간영혼의 실체

영산불교의 위대성은 서구 지성인들이 갈망하는 인간영혼의 실체(영원히 죽지 않는 1·2·3번 영체, 육체와 1·2·3번 영체를 연결시키는4번 영체)를 밝혔다는데 있습니다.(인간의 영체는 4겹으로 다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음)

윤회주체와 관련, 부파불교에서는 여러 이론(푸드갈라〈Pudgala>, 識 <vijnāna>, 상속), 이를 종합한 무착·세친의 유식(唯識)에서의 아뢰야식, 선불교에서의 주인공(主人公), 마음자리(空)는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나我 주인공(主人空_ 1·2·3번 영체)만이 나(我)의 실체이면서 윤회의 주체이고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무시무종(無始無終)이어야 합니다.

아뢰야식이나 마음자리(空)는 윤회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는 바, 첫째, 창조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인연소생도 아니어야 합니다(창조론은 아님).  둘째, 무시무종 불생불멸이어야 하는데 아뢰야식은 진여(眞如)에서 무명(無明)이 더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부정(否定)하며, 마음자리(空)는 텅 비어있으므로 윤회의 주체자격이 될수가 없고 셋째, 업(業)의 종자가 보존 훈습 이숙(異熟)할 공간적 개념(6根의 體)을 갖추어야하는데 식(識)은 그렇지 못합니다. 넷째, 윤회의 주체는 오온(五蘊) 복사체와 닮은 본체(나我 主人空)라야 하고 다섯째, 다층구조(다중구조)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1·2·3번 영체는 항상 뭉쳐 있음). 그리고 명부(冥府)에 갈 때 나我 주인공(1·2·3번 영체)이 가며 4번 영체(육신이 생길 때 만들어 짐)는 차원이 달라 커트되고 1·2년 후에 산화됩니다. 아뢰야식은 지옥이나 극락에 가서 고(苦)와 락(樂)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 자격이 없습니다.

8. 맺는말

선불교의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부처이지 부처님 없다’는 말과 극락 지옥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과 정법을 능멸 모독하는 대망어 죄로써 죽어서 무간·극무간 지옥을 분명히 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고한 눈 먼 중생을 지옥으로 끌고 갈 작정입니까? 이것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윤회의 주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대망어입니다. 이런 업(業)을 지으면 사람 몸 받아와도 삼중고 사중고의 과보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있다 없다’를 초월한 무아 속 절대계에 빛의 몸으로 여여히 계십니다. 유식가(唯識家)의 아뢰야식도,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주인공(主人公)도 윤회의 주체자격이 없습니다. 신불교(영산불교)에서 노파심절(老婆心切)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산불교대학 교수 법장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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