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년여를 연재해 온 조당집 읽기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그래서 《조당집》에 기록된 한국의 선사들을 <바다를 건너간 해동의 선사들>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서 서술하려고 한다.
우리나라에 선이 최초로 전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법랑(法朗, 7세기~8세기)에 의해서이다. 법랑에 대해서는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는데,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4조 도신(道信, 580~651)에게 배웠다고 한다. 그 내용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조인 도헌(道憲, 824~882)의 비명(碑銘)에 남겨져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도헌의) 법의 계보를 보면, 당의 제4조 도신을 오대(五代) 스승으로 하여 점차 동쪽의 이 땅에 법을 전하여 왔는데, 법맥을 위로 따져보면 쌍봉(雙峰)의 제자는 법랑이고 손제자는 신행(愼行)이며, 증손제자는 준범(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慧隱)이며, 내손제자가 대사이다. 법랑대사는 대의(大醫) 4조 도신에게서 크게 깨달았는데, 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도신대사명(道信大師銘)’에 이르기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여기에 이르러,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갔다”했으니, 그가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장(秘藏)한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 뿐이었다.

최치원이 쓴 이 비문에 의하면, 중국선종 제4조 도신[雙峰]의 제자인 법랑은 신라에 귀국한 뒤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중국에서 가지고 온 보물을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가지고 온 보물’이란 선법(禪法)을 가리키는데, 당시 신라에는 유식이나 화엄과 같은 교학이 성행하고 있었으므로 산속에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성덕왕 셋째 왕자 728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오십나한 중 한 명으로 유명
 현재도 이름 딴 거리 있어
 보당종조 무주가 그의 제자

또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의하면, 5조 홍인(弘忍)의 10대 제자 가운데 ‘양주(揚州)고려승 지덕(智德)’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란 고구려를 가리키는데, 중국의 양주지방에서 활약한 고구려 승 지덕이 홍인의 10대 제자에 들어갈 만큼 고승이었다는 것이다. 지덕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가 없다. 또 법랑의 제자로서 신행(愼行, 704~779)이 있다. 신행은 경주출신으로서 법랑에 나아가 공부하다가, 법랑이 입적하자 당에 유학하여 북종의 지공(志空) 밑에서 수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상 법랑·지덕·신행의 세 선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선이 전래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전한 선은 4조 도신, 5조 홍인의 북종선이다. 북종선은 《능가경(楞伽經)》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 좌선(坐禪)과 관심(觀心)을 주로 가르친다. 특히 법랑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저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금강삼매경》은 원효가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하지만, 《금강삼매경》의 내용이 선에 가깝다는 점에서 법랑의 저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활약한 해동의 선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일 것이다. 정중무상은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셋째 왕자로써, 728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처적(處寂, 648~734)에게서 공부하고 사천(四川)지방에서 주로 활약한 고승이다. 정중무상은 중국에서 활동하다 입적했기 때문에 의외로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사천지방에서는 오십나한(五十羅漢)의 한명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한 스님이다. 현재에도 무상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고 한다.

 무상선사의 세 가지 특징
 티벳에 중국불교 전파
 마조도일 선사와 동학
 삼구설과 인성염불 강조

 
무상은 주로 김화상(金和尙)으로 불렸는데, 선종사에서 속가의 성으로 불린 예는 마조도일(馬祖道一) 외에는 없다. 마조(馬祖)란 속성이 마씨(馬氏)이기 때문에 마조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만큼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천지방에서 활약한 무상은 정중종(淨衆宗)을 개창하였으며, 보당종(保唐宗)을 개창한 보당무주(保唐無住)가 그의 제자였다. 무상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1)티벳에 중국불교를 전파
티벳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사천지방에 가깝다. 그런데 티벳에 중국불교를 전한 사람이 바로 무상이라는 것이 티벳의 역사서인 《바세》와 《학자의 연(學者의 宴)》에 나타나 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삽화=장영우 화백

티벳의 왕자 찌송데짼에게는 가르겐 쌍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쌍시는 중국에서 온 사신(使臣)의 아들이었다. 가끔 왕자가 불교의 경전에 대하여 물어오면 쌍시는 자세히 대답해 주었으므로, 찌송데짼은 점점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부왕 찌데꾸쩬(704-754)왕은 드디어 왕자를 위해서 중국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들이고자 결심하고 쌍시 등 4인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서방에서 보살이 오신다’‘라고 예언되어 있었기에, 쌍시 일행이 도착하자 중국의 승려들은 환영하여 맞이했다. 중국의 황제는 경전 천 권을 하사하여 티벳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후 일행은 티벳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랑이를 끌고 가는 익주김화상과 만났다. 그 때 김화상은 쌍시일행에게 “지금 티벳에는 부왕이 죽고 대신들에 의해서 파불(破佛)이 일어나고 있으니, 뒤에 왕자가 왕이 된 후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그 후 쌍시 일행은 오대산(五台山)을 방문하여 여러 가지 기적을 접하고 티벳에 돌아가니 과연 김화상의 말대로 파불 중이었다. 쌍시일행은 중국에서 구해온 경전들을 침뿌의 동굴 속에 감추고 시기의 도래를 기다렸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찌송데짼왕자가 왕이 되자 불교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쌍시는 김화상의 말을 기억하고 동굴에서 경전을 가지고 와 왕에게 바쳤다. 왕이 먼저 《십선경(十善經)》을 읽으니 신앙심이 일어났고, 다음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으니 크게 불법을 존경하게 되었고, 《도간경(稻竿經)》을 읽자 왕은 점차로 청정행(淸淨行), 청정견(淸淨見)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은 불법을 진심에서 믿게 되었고 티벳에 정식으로 불법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상이 티벳에서 불교를 도입하게 된 경위이다. 뿐만 아니라 티벳에는 무상선사의 어록이 티벳어로 번역되어 있었다고 한다.

2)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과 동학(同學)
마조도일의 고향은 사천성(四川省) 한현(漢縣)이다. 그런데 마조도일은 출가한 직후 처적에게 참학하였는데, 이때 무상도 처적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아마도 마조가 구족계를 받았을 시점인 20세 전후에 무상과 함께 공부했다고 생각된다. 이때 이미 무상은 사천지방에서 이름난 승려였으므로, 마조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말해지듯이 무상이 마조의 스승은 아니다. 무상과 마조는 사형사제 간이었으며, 마조의 스승은 육조혜능의 제자인 남악회양(南嶽懷讓)이기 때문이다.

3)삼구설(三句說)과 인성염불(引聲念佛)
무상은 항상 삼구 즉, 무억(無億)·무념(無念)·막망(莫忘)의 세 가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무억이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억측하지 말 것’인데, 이것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무념이란 ‘미래의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는 것’이며, 막망이란 ‘현재에 있어서 지혜와 상응하여 어둡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또 무상은 제자들에게 항상 인성염불(引聲念佛)을 수행하게 하였는데, 인성염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소리를 크게 하여 염불하다가 점점 소리가 작아져서, 결국에는 소리가 없어지게 한다. 즉 ‘아미타불’하는 소리를 마음속에 보내는 것이다. 그러다가 번뇌가 다시 커지면, 또 염불하여 아미타불을 마음속에 보낸다. 이와 같이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여 마음속에 두어, 무상(無想)으로 되면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동국대불교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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